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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을 욕하며, 십칠주 한 잔

승발이-백반기행 피디
- 10분 걸림 -

“형. 술 한잔만 받아줘요”. 봄이 끝나갈 무렵 데이비드 보위의 LP를 허접한 포터블 턴테이블에 올린다. 늙은 스피커에서 ‘Space Oddity’의 낡은 기타 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짙은 잿빛 아르마니 슈트에 지나치게 단정해서 오히려 퇴폐적인 골든 헤어를 쓸어 올리며 빛바랜 짝눈이 날 바라본다.

“뭔 일 있나 친구?”

“네. 형. 근데요 그렇게 스피커 위에 다리 꼬고 앉아 있지 말아요. 스피커 약해서 망가져요”

“어? 그래”. 타고난 건지, 의도된 건지 알 순 없지만 보위 형은 폼을 너무 잡는다. 처음 볼 때는 한 없이 멋있더구먼 몇 번째 보니 과해 보인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사하다. 하긴 지금 나의 심정은 멋있는 척하는 저 형의 모습이 딱 꼴 보기 싫은 상태다. 아무 맛도 안나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문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위 형을 꼬나본다. 내 눈매에 평소와 다름이 그늘져 있음을  빨리 알아봐 달라는 투정을 한 꼬집 섞어서.

“표정이 더럽군, 친구. 로큰롤이 자살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야”

빌어먹을 귀신 어떻게 알았을까. 로큰롤처럼 떠들썩하고, 호방하고, 흥겨웠던 한 친구가 스스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한 줄의, 한 자의, 한 톨의 메모도 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이유를 찾아보는 친구들의 허망하고 슬픈 눈동자만 허허하게 떠다닐 뿐, 사라짐의 진실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라짐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과정 내내 단 한 번도 울지 못했다. 마취한 몸에 아무리 칼질을 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듯 현실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슬픔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꽁꽁 얼은 사과는 속부터 썩어 들어가고, 비현실적인 진실에 취해버린 마음은 짙은 내상에 젖어 들어 간다.

“보위 형 아파요. 너무 아파요. 나는 괜찮다고, 세상 모든 이별에 덤덤할 거라고 각오했는데, 더럽게 아파요 “

“술로 씻어내렴. 네가 좋아하는 막걸리로. 근데 사라진 친구도 막걸리 좋아했니?”. “위스키 좋아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비싸고 고급지고 있어 보이는 걸 좋아했다. 허세 가득한 성격을 술과 음식에도 예외 없이 반영하는 녀석이었다. 한심한 놈이라고 욕도 두둑히 처먹었지만 껄껄껄 웃어버리는 로큰롤 마인드 때문인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놈이었다. 위스키도 블렌디드에서 싱글 몰트로 유행 따라 가려 먹던 녀석이지만, 친구가 막걸리 글을 쓴다고 동네방네 떠들면서, 나의 얄팍한 막걸리 수다를 즐겁게 들어주던 그런 놈에게, 진한 막걸리 한잔 건네고 싶다. 십칠주다.

십칠주 (봇뜰, 경기 남양주)

심플하게 빚은 술이다. 가수가 되었으니 막걸리라 불러야 하겠지만, 탁주 원형에 가깝다. 도수가 17도이기 때문이다. 마셔본 막걸리 중 최고의 도수다. 미숫가루를 푼 듯한 연한 갈색이 곱다. 17주를 숙성하고, 17도여서 술 이름이 십칠주다.

알코올 : 17도

재료명 : 쌀, 정제수, 누룩

정직하게 잘 빚은 술이다. 기교 없이 물과 쌀과 누룩으로만 빚어서 충분히 숙성시킨 녀석이다. 살짝만 머금어도 풍만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차갑게 식은 쌀밥을 꼭꼭 씹어 먹으면 입 안에 퍼지는 진한 단맛을 알 수 있다. 십칠주가 그렇다. 한 모금 머금으면 쌀의 단맛이 혀를 간지럽히고, 쓴맛이 독한 자극을 준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실 수 있는 막걸리다. 사라져 버린 추억처럼 말이다.

“이 막걸리는 입이 아니라 속에서 강렬하네. 어정쩡한 소주보다 세군”. “그럼요. 17도인데요. 이 정도 술이면 사라진 녀석도 좋아하겠죠. 근데 도대체 왜 스스로 사라져 버린 걸까요?"

외로웠을 것이다. 회사 내의 파벌 싸움에, 사기꾼 대표 놈에게 뒤통수를 시원하게 얻어맞은 친구는 사표를 던졌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갈 곳은 좁다. 쿵짝쿵짝 화려한 도심의 무대에서 로큰롤을 연주해야 될 녀석이, 짐을 싸 지방 도시로 취업 이사를 갔다. 혼자 산지 20여 년. 짐은 단출했다. 지방 도시지만 제법 탄탄한 회사라며, 일이 새롭고 재밌을 거라며 예의 그 허세 가득한 호방한 웃음을 곁들였지만 왠지 샤우팅이 허전했다. 그래도 본인이 리더로 일을 할 수 있음에 즐거웠다. 50대의 중년이 바로 직장이라는 무대를 마련했음에 뿌듯했다. 봄이 왔다.

“나 회사 잘려서 여행 좀 다녀오련다”. “잉? 뭔 소리여”. “뭐 그렇게 됐다. 껄껄껄. 여행 다녀와서 술 한잔 하자”.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는 부러진 치즈 스틱처럼 너무 쉽고, 연하게 끊어져 버렸다.

무대에서 쫓겨난 허탈감을 핸드폰이 증폭시킨다. 짜증 나게 자주 울리던 핸드폰의 시그널이 사그라 진다. 업무용 연락도, 접대용 문자도 사라져 간다. 내가 찾는 연락처는 늘어나고, 나를 찾는 연락은 실종된다. 단톡방의 신호음만이 넘실대는 핸드폰을 잠시 잊으려 여행을 간다. 친구들과 떠들 떠들 정겨운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은 외딴 도시, 월세 30의 어둡고 외딴 공간이다. 아무도 없다. 좁디좁은 공간, 끝 모를 공허함의 심연에 포위가 된다. 아침에 눈을 뜬다. 무엇을 해야 하나 눈을 껌뻑인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친구는, 외로웠을 것이다.

“막걸리 한 잔 더하자”

진한 단맛과 쓴맛이 입을 적신다. 십칠주는 벌컥벌컥 마실 수 없는 흔치 않은 미인이다. 작은 몸짓으로도 존재감을 알릴 수 있는 매력적인 미인. 하지만 찬찬히 느껴야 한다. 아주 천천히 혀를 굴려야 한다. 자극적이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겉보기에는. 속을 타고 들어왔을 때만 후끈하다. 야한 자극이 없기에, 몽글몽글 마시다 보면 어느새 영혼을 앗아갈 위험한 술이다. 숙성이라는 명분 아래 참고 지내온 17주라는 시간은 술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부드럽게 담아 놓았다. 17주는 막걸리가 자연미인으로 거듭나는 성형의 시간이었다. 버티고 버티니 얻어낼 수 있었던 고급지고 달콤한 맛이 어둡고 긴 시간 속에 숨어 있었다. 사라진 친구야 너는 그럴 수 없었니.

“자네 친구는 장미를 닮았나 보군”

“네? 장미랑은 거리가 먼데요”

“장미는 꽃이 지면 꽃잎이 한 번에 떨어져 내리거든.  화려함 속에 숨은 꽃잎의 무거움을 견디고 견디다 대가리가 꺾이면,  우수수 남김없이 꽃잎을 떨구고 말지.  장미가 떨어져 가는 꽃잎을 바라보기 싫은 건지, 긴 호흡으로 버티는 법을 모르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네. 다만, 장미의 치명적인 아픔은 가시가 아니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꽃 속에 숨겨 놓은 화려함의 무게라는 점이지”

술잔을 들이켜다 덜컥 술이 멎는다. 그런 거였니, 친구야. 천천히 호흡을 한다. 십칠주의 달큼한 향이 술기운에 실려 올라온다. 장미의 화려한 향은 아니다. 들녘에 잔뜩 피어나는 개망초를 닮은 수수한 향이다. 언뜻 참외의 단내가 스치기도 한다. 소박하고도 은은한 향을 막걸리에서 느끼는 건 행운이자 행복이다. 십칠주야, 너는 버티고 버텨서 많은 것을 얻었구나.

“난 이만 가봐야겠군. 지금은 나보다  음악이 자네에게 더 필요한 시간이야. ‘Rock’n’Roll Suicide’를 들어보게"

“그 노래가 지금 딱 싫어요. 노래 제목이 드럽게 재수 없어”.

“제발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 가사 번역기라도 돌려보라고. 난 ‘Rock’n’Roll Suicide’로 사람들이 고독으로부터 치유받기를 좀 있어 보이게 노래했을 뿐이야"


“Oh no, love, you’re not alone

You’re watching yourself but you’re too unfair

You’ve got your head all tangled up but if I could only make you care

Oh no, love, you’re not alone

No matter what or who you’ve been

No matter when or where you’ve seen

All the knives seem to lacerate your brain

I’ve had my share, I’ll help you with the pain

You’re not alone”

“오, 안돼, 사랑아, 넌 혼자가 아니야

넌 너 자신을 지켜보지만 너는 너무나 불공평해

얽힌 채로 있는 네 머리를, 내가 신경 써줄 수만 있다면

오, 안돼, 사랑아, 넌 혼자가 아니야

무슨 일이든 누구든 넌 지나왔고

언제든 어디든 넌 본 일이 있었고

칼날들이 너의 머리를 찢어놓는 것 같아도

내가 경험한 만큼, 네 고통을 도와줄게

넌 혼자가 아니야”

-- 데이비드 보위, [Rock'n'Roll Suicide] 중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십칠주를 입으로 옮겨 놓는다. 뭐지 이건? 단맛과 쓴맛 사이로 뭉근하게 산미가 올라온다. 시간이 지나 공기를 만나니 신맛이라는 숨겨놓았던  매력마저  드러낸다. 하. 그렇구나. 17주를 참아 낸 막걸리는 이토록 깊은 맛을 층층이 담아냈구나. 빌어먹을. 버티고 버텨야 하는구나. 막걸리에게 오늘도 또 하나를 배운다.

R.I.P 레지. 사라져 버린 너에게 막걸리 한 잔과 욕 한 자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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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썰

승발이-백반기행 피디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CP(책임 피디)로 전국의 맛깔나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을 하던 중 막걸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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