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기본기, 봇뜰 탁주(남양주, 봇뜰)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첫 문장)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천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인류의 유산과도 같은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첫 문장을 위해 얼마나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을까? 나는 봇뜰 탁주의 첫 문장을 쓰기 위해서 3주를 넘게 아이 패드 화면만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결국엔 마르케스의 첫 문장을 대출받아 겨우 시작하고 있다. 능력의 부족일 수도 있고, 표현력의 한계일 수도 있고, 게으름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봇뜰 탁주에 대한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이유는 이 녀석을 벌컥벌컥 마셔야 할지, 홀짝홀짝 마셔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알코올 : 10도
재료명 : 쌀, 정제수, 누룩
“술을 빚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저만의 누룩이다. 시간도 많이 들고 체력 소모도 크지만,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022. 10.17 경인일보)
봇뜰 양조장 권옥련 대표의 말이다. 전업주부였다가 어머니의 술맛을 재현하기 위해 독학으로 장인이 되신 분이다. 봇뜰에서 나온 백수환동주와 떠먹는 막걸리 이화주는 전통주 애호가들 사이에선 전설 같은 술이다. 백수환동곡과 이화곡이라는 고문헌에 기록된 누룩을 직접 빚고, 술을 담아 출시까지 했기 때문이다.
자가 제조 누룩에 좋은 쌀과 맑은 물이 전부라는 봇뜰 양조장의 라인업 중에서 가장 가볍게 즐길 수 있게 뽑은 술이 봇뜰 탁주라고 한다. 마셔보자.
첫 잔
한 입 가득 넣어 꿀떡 삼켜본다. 아주 좋다. 멋진 산미가 희미한 바닐라 향을 타고 투박하지만 정감 있게 날아온다. ‘탁주’라는 단어와 딱 어울리는 맛이다. 만만치 않은 도수 10도지만 쓴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탁하지만 부드럽게 넘어가는 질감은 적은 탄산의 아쉬움을 잊게 만든다.
둘째 잔
단맛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찾기가 힘들다. 풍부하지만 시큼하지 않은 산미 속에 보드랍고 달큼한 향이 술을 머금은 후에 느껴지지만, 단맛은 여전히 어딘가에 숨어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미인의 입술과도 같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맛.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하기도 싫다.
셋째 잔
술잔을 채워놓고 가만히 바라본다. 숨어있는 단맛을 찾기 위함은 아니다. 문득 이 녀석을 ‘벌컥벌컥’ 마셔야 할지, ‘홀짝홀짝’ 음미해야 할지 스스로 궁금해졌다. 벌컥벌컥 마시자니 900ml에 8000원이라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와인이라면 ‘오! 가성비 좋은 녀석인데’라며 입 안에 털어 넣었을 가격인데, 막걸리라고 하니 왠지 아껴 마셔야 할 것 같다. ‘까짓것 8000 원 정도야 플렉스 할 수 있잖아’라고 소심한 호기를 부리려니 도수가 10도다. 부어라 마셔라 하다간 개꽐라가 되기 십상인 도수다. 가격과 도수 앞에 적잖이 주눅 들어 홀짝홀짝 혀를 적셔본다. 맛이 농밀하니 홀짝여도 충분히 즐길 만 한데, 허전하다. 막회를 좋아하는 사람이 오마카세의 고급스러운 사시미 한 점을 천천히 씹으며 느끼는 정서적 허기짐이, 봇뜰 탁주를 홀짝일 때 떠오른다.
기껏해야 전체 주류 시장의 10% 밖에 차지하지 못하는(2022년 기준 맥주가 35%, 소주+증류주가 34% 점유율이다) 막걸리다. 그나마도 인터넷 판매 가능하기 전에는 5%를 넘지 못하던 막걸리였다. 가냘픈 판매량에 비해 막걸리는 참 대중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새참 드시는 할아버지도 소맥을 말아 드시는 현실이건만, 술꾼들의 추억 속에는 늘 막걸리가 있다. ‘막걸리 마시다 대가리 깨지는 줄 알았어’, ‘할머니가 담가준 막걸리 무지 맛있었는데’, ‘비 오는 날에 막걸리에 파전이지’, ‘예전에 막걸리 받아오는 심부름 많이 했는데’, ‘등산하고 막걸리 한잔은 진리지’, ‘배고플 때 밥 대신 막걸리 마시면 일석이조였잖아’ 등등 막걸리는 지나간 일상과 꽁꽁 엮여, 한번 쳐다보고 추억을 되씹고, 또 한 번 쳐다보고 기억을 되찾는 지붕에 매달린 굴비 같은 존재였다. 바라만 보고 먹지 못하는 것이 가난한 집안의 굴비였다면, 바라만 보고 먹지는 않는 그저 그런 먹거리가 막걸리였다. 지나간 경험으로 쌓은 추억이라는 울타리 안에 막걸리를 넣어두고 바라만 보며 즐기고 있었다.
“야, 막걸리 마시면 머리 아프잖아. 그리고 뭔 막걸리가 한 통에 만 원이나 하냐”
“너 막걸리 요새 마셔봤니?”, “아니”
“왜 마셔보지도 않고 머리 아플 거라 생각하냐? 그리고 와인 한 병에 만 원이면 싸다 그러잖아”
“그건 와인이잖아. 됐어. 그냥 각자 좋아하는 거 마시자"
막걸리는 싼 맛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굳어있는 중년들의 흔하디 흔한 술자리 대화다. 싼 맛에 벌컥벌컥 마음껏 마실 수 있으니 숙취에 쩌들어 두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싼 맛에 어디서든 구할 수 있기에, 대중적인 서민의 술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싼 맛에, 싼 맛에, 싸니까. 과거에는. 추억 속의 막걸리는. 그랬다. 막걸리는 언제까지 추억 속에 갇혀 있어야 하나?
추억의 울타리 안에서 맴도는 ‘싼 값’의 막걸리를 풀어 줘야 한다. 2023년의 막걸리는 비싸고, 좋은 막걸리가 도처에 널려있다. 탁주의 원형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봇뜰 탁주가 ‘무려’가 아닌 ‘단 돈’ 8000 원이다. 부담되면 벌컥벌컥이 아니라 홀짝홀짝 마시면 된다. 그래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취할 수 있다. 추억은 현실을 꾸미는 포장지지 선물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막회는 막 먹어야 맛있는 거고, 오마카세 사시미는 차분히 먹어야 맛있는 거다. T.P.O는 음식에도 있다.
넷째 잔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기에 충실했기에 박지성 선수는 윙포워드, 미드필더, 윙백을 넘나들며 필드를 누볐다. 봇뜰 탁주도 그렇다. 막걸리답게 사발에 한잔 가득 담아 호쾌하게 목구멍을 넘겨도 좋고, 작은 잔에 음미하듯 마셔도 좋다. 술상이라는 필드 위에만 있으면 어디서든 제 몫을 한다. 다만 이 녀석이 10도 임을 잊으면 안 된다. 한 잔 가득 부어 절반을 벌컥 들이킨 후 홀짝되며 잔을 비운다. 산미와 쌉싸르한 술맛 뒤에 남는 은은한 바닐라 향이 얼큰한 호흡 속에서 유영을 한다. 아, 취해 가는구나. 그래서 더 정이 간다. 원래 술은 이 맛에 마시는 거니까.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신화 같은 첫 문장은, 작가 개인의 추억으로 새긴 판화이다. 끓는 얼음(아마도 드라이아이스라고 생각된다)을 구경 가자는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거리를 나섰던 어릴 적 기억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에는 작가의 추억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마르케스는 ‘어떠한 상상도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며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소설로 쓴 적이 없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하지만. 마르케스의 추억은 늘 현실의 풍자와 해학으로 재구성되었다. 단순한 추억 팔이가 아니었다. 마르케스의 소설에서 작가 개인의 기억은 부조리한 현시대를 날카롭게, 유머러스하게, 신비하게, 재미있게 ‘썰’을 푸는데 활용되었다. 단 한 번도 현실을 떠난 적이 없기에, 작가 추억의 재구성은 동시대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막걸리도 그래야 한다.
한 때, 아니 얼마 전 마르케스의 글을 읽으며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다. 사실 읽을 때마다 힘들어 졌다.
"마르케스 글을 읽으면 기운이 쪽 빠져. 어떻게 글을 저렇게 재밌게 쓸 수 있지. 난 왜 안되지?".
한 친구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미친거 아냐. 왜 널 마르케스랑 비교하냐. 너 노래방에서 조용필보다 노래 못한다고 실의에 빠지냐?"
젠장. 팩폭에 뼈를 맞아 아직도 아프다.
승발이의 맛 평가 : 기본기가 완벽한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면 봇뜰 탁주를 추천한다. 좋은 술이다. 4.5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담백한 손두부에 돼지고기 전지를 넉넉히 넣고 볶은 김치를 곁들인 두부김치가 좋다. 김치 쪼가리만 대충 식용유에 볶은 빈약한 두부김치는 아니다. '아쿠. 제육이 이렇게나 많이'라고 할 정도로 넉넉함이 담긴 두부김치여야 한다. 완벽한 기본기를 갖춘 막걸리에 그 정도는 되어야 마시는 흥이 있다. 곁들임 노래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To Run'. 흥겹게 '감상'할 수 있는 기본기에 충실한 록큰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