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남도의 맛 세번째, 해남 막걸리와 묵은지 & 풀드포크
지금 해남은 막걸리 삼국지입니다. 전국구 명성의 ‘해창 막걸리’와 꾸덕한 질감의 끝판왕 ‘송우종 황금주’, 그리고 바로 ‘해남 막걸리’가 해남 막걸리계를 삼분하고 있죠. 해창 주조장의 사장님은 서울분이고 황금주를 빚는 옥천 주조장의 송우종 명인도 옥천에서 오신 분입니다. 해남 토착 주조장은 두륜산 밑에서 해남 막걸리를 빚고 있는 삼산 주조장 한 곳뿐입니다. 세 막걸리 모두 훌륭합니다만, 이 얘기를 하고 나면 꼭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당신이 가장 베스트로 꼽는 건 뭐죠?”
저는 이 질문에 오랜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원픽은 “해남 막걸리 12도”입니다. 마셔보면 압니다. 풍부한 과일향과 보드라운 달콤함, 기분 좋은 산미가 어우러진 풍성한 질감이 입 안을 가득 적십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걸쭉하지도, 12도의 쓴맛이 도드라지지도 않습니다. 절묘한 어울림의 미학이 막걸리에 담겨있죠. 게다가 가격은 해창 막걸리 12도의 절반인 7,500원. 와우! 대단합니다.
해남 막걸리를 처음 만난 곳은 남도 음식 명가 ‘한성정’이었습니다. 떡갈비를 중심으로 맛깔스러운 남도 정식을 한 상 푸짐하게 차려내는 곳이죠. 한성정 주인아주머니에게 함께할 지역 막걸리를 부탁드렸더니 준비해 준 녀석이 바로 이 ‘해남 막걸리’ 였습니다. 추천해 준 이유가 있더군요. 막걸리 자체의 맛도 좋지만 지나치게 걸쭉하지 않아 개성 넘치는 남도 한정식과의 어울림이 아주 좋았습니다. 보드라운 질감의 단맛과 산미가 곰삭은 남도 음식을 포근하게 감싸줍니다. 입안에서 술과 음식이 과하게 넘치지 않고 게미지게 만납니다. 아! ‘게미지다’는 말은 남도 사투리로 ‘감칠맛 있네’, ‘맛나다’의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해남 막걸리 12도’는 포용성이 좋은 막걸리입니다. 만약 해창 막걸리 12도나 송우종 황금주를 반주로 남도 한정식을 먹는다면 분명 과하다는 기분이 생길 겁니다. 막걸리 자체의 질감이 너무 무겁거든요. ‘해남 막걸리 12도’와 어울리는 안주는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20대 때 강진 해남 장흥 일대를 속속들이 다닌 적이 있습니다. 헌병대 D.P, 탈영병 체포조였거든요. 전라도가 고향인 고참이 밥집을 데려갔습니다.
“아주머니, 여기 묵은지 있으면 쪼께만 주쇼”. 처음 들어보는 ‘묵은지’, 1990년대만 해도 묵은지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3년 묵은 김치니까 함 먹어봐. 서울 촌놈이 먹어봤겄어” 맛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맵고 시고 짠 곰삭은 자극적 맛이라니.
그러던 남도 묵은지가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국의 맛이 됐으니, 미디어의 힘은 참 대단합니다. 이름만으로는 오래만 묵혀두면 모든 김치는 묵은지가 될 수 있지만, 남도 묵은지의 맛은 낼 수 없습니다. 김장법이 다르기 때문이죠. 몇 년 전에 고흥의 한 가정집에서 김치 담그는 모습을 촬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장 양념이 다르더군요. 생조기, 생새우, 고춧가루, 무 등 해산물과 채소를 곱게 갈아버리더군요. 젓갈로 간을 하는 게 아니라 생 해산물과 소금으로 간을 합니다. 어찌 보면 김장 양념으로 젓갈을 담그는 것 같더군요. 생 해산물이 배추와 함께 염장되어 3년의 시간을 버텨내니 그 곰삭고 진한 맛의 깊이가 생기는 겁니다.
남도 손맛은 참 지혜롭습니다. 사실 묵은지를 많이 먹기는 힘듭니다. 워낙 개성이 강하기 때문이죠. 3년을 땅 속에서 버텼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겠습니까? 성질이 보통이 아니죠. 그래서 묵은지를 넉넉히 즐기려면 씻어내야 합니다. 여기서 남도 손맛의 지혜가 빛을 발하죠.
“할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동치미 국물에 담가서 짠기와 양념을 씻어냈어요. 할머니도 전라도 분이시거든요.” 서울 망원동 퓨전 비스트로 [국빈관] 주인장이 묵은지 반찬을 내놓았을 때 ‘기가 막힌 한 수’ 다란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묵은지를 물에 씻어내면 맛도 씻겨나갈 것 같으니 세상에나! 동치미 국물로 묵은 양념을 씻어내어 자극적인 맛은 덜어내고 동치미 국물의 감칠맛을 더해 놓습니다. 그냥 먹어도 간이 딱 좋고, 고기와 함께 먹어도 간이 딱 좋습니다. 매운맛도, 짠맛도, 신맛도 은은하게 배인 묵은지에 해남 막걸리 12도의 녹진한 새콤달콤함이 더해지니 어떻겠습니까. 아름답지요. 허전함을 가득 채워주고 넘치는 맛의 등장입니다.
막걸리에는 파전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짝꿍이 많거든요. 혹시 집에 시어서 처치 곤란한 총각김치가 있으면 대충 잘라서 들기름 넣고 푹 지져 보세요. 그리고 해남 막걸리 12도 한 통을 벗 삼아 함께 합을 맞춰보시죠. 아따! 기가 막힐 겁니다. 다른 김치 종류도 비슷합니다. 신김치도 좋고 처치 곤란 갓김치도 좋습니다. 들기름에 지져서 막걸리와 드셔보세요. 고기 한 칼 더해도 되고, 어묵이나 소시지를 넣어도 좋습니다. 멸치가 들어가도 괜찮겠네요. 어째 거나 지져서 드셔보세요. 한 여름에 지친 당신의 입맛에 딱 떨어질 겁니다. 그리고!
남도의 막걸리와 음식 페어링을 생각하면서, 제 막걸리 리스트 중 비장의 카드인 ‘해남 막걸리 12도’를 꺼내든 건 미국 남도의 음식 ‘풀드 포크’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동치미 국물에 담근 묵은지를 만들어준 식당 주인장은 퓨전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음식점 이름이 <국빈관>인데요, 대다수의 사람이 이 이름을 들으면 나이트클럽으로 오해한다고 하는데 주인장 이름이 ‘김국빈’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작명입니다. 각설하고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가 바로 '풀드 포크'인데요, 이 음식을 먹다 그만 ‘해남 막걸리 12도’를 공개하고 말았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와 테네시 주에서 특히나 사랑을 받는 풀드포크는 미국 남부 전역에서 즐겨 찾는 음식입니다. 미국 남부가 곧 남도이니 한번 경험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풀드포크는 미국 남부 노예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음식입니다. 노예들이 접할 수 있는 고기의 질이 그렇게 좋진 않았겠죠. 돼지의 어깨살 같은 퍽퍽한 살을 농장주에게 받은 노예들은 지혜로움으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장시간 저온 조리법이죠. 퍽퍽한 돼지살을 80도 정도의 저온에서 8시간~12시간 정도 훈연하듯 익혀줍니다. 고기 내부 온도가 90도 정도가 되면 고기결을 따라 잘게 찢어줍니다. 이 역시도 고기를 부드럽게 먹기 위한 방법이죠. 잘게 찢은 고기를 각종 양념으로 버무려서 먹습니다. 잘게 찢었기 때문에 양이 많아져 여럿이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겠죠. 여러모로 한국적 정서와 닮은 음식입니다. 고기만 먹고 해남 막걸리를 마셨을 때는 고기맛이 약간 겉도는 느낌이 있는데, 나초나 얇은 난에 고기쌈을 싸서 해남 막걸리와 함께하니 어우러짐이 제법 괜찮습니다. 아마도 풀드 포크 양념 맛이 막걸리와 단독으로 만나면 툭하고 도드라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 풀드포크를 장시간 저온에서 익히는 이유는 고기를 연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지만, 돼지 특유의 비린 향을 제거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양고기의 경우 영구치가 나기 전과 후를 나눠 영구치 전의 양을 램(Lamb), 영구치가 난 양을 쉽(Sheep)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고기, 즉 램 고기를 Mutton이라고 부릅니다. 양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유가 특유의 냄새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대부분은 영구치가 난 양고기를 먹었기 때문이죠. 말이 좀 길어졌네요. 영구치가 난 양을 특유의 역한 냄새 없이 조리하는 방법이 풀드 포크처럼 저온에서 오랫동안 익혀 근육 속 지방을 녹여내는 겁니다. 지방 속에 안 좋은 향 성분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예전 미국 남부 노예들이 받은 돼지도 비슷했을 겁니다. 늙고 맛없는 돼지였겠죠. 그래서 장시간 조리해서 안 좋은 고기향을 없앴을 겁니다. 맛을 위한 사람들의 지혜와 집념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해남 막걸리 12도’와 ‘풀드 포크’, 그리고‘묵은지’!
지방이 없는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풀드 포크의 퍽퍽함도 묵은지에 싸 먹으면 완벽히 사라지죠. 서양식 양념도 묵은지는 3년 숙성의 연륜으로 넉넉히 감싸주네요. 동치미 국물 머금은 감칠맛도 더해지고요. 먹다 보면 어느새 묵은지가 주연보다 매력적인 술상의 조연이 됩니다. 묵은지는 막걸리 술상의 신 스틸러입니다.
TIP
풀드포크도 맛볼 수 있고, 어복쟁반도 맛볼 수 있는 재미난 식당을 찾는다면 국빈관이 있습니다. 퓨전 비스트로 펍답게 한국인에게 친숙한 음식을 개성 넘치는 조리장이 흥미진진하게 조리합니다. 이 집의 특징은 새롭지만 친숙하고, 도전적이지만 넘치지 않는 맛에 있습니다. 오붓한 분위기도 좋고요. 여유로운 한 잔을 위한 좋은 공간입니다. 아! 막걸리가 없는 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