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엔 치킨과 막걸리, '치막'이다. 손막걸리&지평 이랑이랑
연기가 자욱하다. 츠아아아아악 타닥타닥타다다닥. 맑은 하늘에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두건을 두르고 온 몸에 분칠을 한 전사들이 뜨거운 열기와 맞서고 있다. 폭주하는 전화에 유선망은 불통 상태다. 띵동 띵동 끊임없이 울리는 경보가 신경을 자극한다. 걷어붙인 팔에는 상흔이 가득하다. 모두가 기름 전선에 투입됐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22시까지는 버텨야 한다. 이곳은 치킨집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돼요”, “포장은 50분이요”, “네? 그럼 축구 시작하는데요. 어떻게 30분 안에 안될까요. 부탁드려요”, “주문이 밀려서 불가능합니다. 기다려주세요”, “아.. 어떻게 안될까요”, “안돼요. 근데 뭐 주문하세요?”, “고추 닭봉이요”, “주문 취소된 게 있네요. 30분만 기다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월드컵과 동시에 치맥 특수가 시작됐다. 한국의 닭집에서는 즐거운 비명이 튀겨지고, 냉장고에는 차가운 맥주가 가득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축구공을 따라, 기름지고 고소한 치킨 한 조각 베어 물고, 탄산 가득 씁쓰름한 맥주 한 잔을 호쾌하게 들이켠다. 상식을 넘어 진리에 다다른 월드컵엔 치맥이다. 하지만 공은 둥글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굳어진 상식에 도전하는 언더독의 반란을 꿈꾸며, 과감한 역습을 시도한다. 치킨과 막걸리. 치막이다. 어울리겠냐고? 어울린다! 치킨과 찰떡궁합의 막걸리가 있다.
복순도가 손막걸리(울산, 복순도가)
복순도가의 대표 막걸리. 935ml 용량의 늘씬한 디자인이 눈에 확 들어온다. 병의 높이로는 막걸리 최정상급이다. 백종원 대표와 나영석 피디가 울산까지 찾아간 주조장인 복순도가의 유명세까지 더해진 녀석이다. 탄산에 주의하라는 딱지가 특히 시선을 끈다.
알코올 : 6.5도
원재료 : 정제수, 쌀, 곡자, 물엿, 설탕, 아스파탐
앙금을 윗술에 섞은 후 병뚜껑을 여는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린다. 열었다 닫았다를 10여 차례 반복했다. 기포가 끊임없이 치치 거리며 넘칠 듯 위협을 가한다. 탄산이 정말 센 녀석이다. 개봉 후에도 1분 넘게 탄산이 부글거린다. 첫인상이 대단히 거친 마초 같은 막걸리다.
첫 잔
시큼한 향이 훅하고 올라온다. 제법 시큼한 산미가 강하게 밀려온다. 고운 맛이 아니다. 누룩의 향을 깔고 앉은 산미가 탄산에 실려 입안을 채운다. 단맛도 약하진 않다. 다만 단맛이 쿰쿰한 산미의 거친 풍미와 탄산에 묻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탄산수를 마시는 듯 강한 기포들이 목젖을 친다.
둘째 잔
꺼억. 트림이 시원하게 나온다. 이 녀석을 마시고 트림을 안 할 수는 없다. 탄산 때문에 그렇지, 맑은 맛의 막걸리다. 탄산이 씻어낼 만한 잡맛을 안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 강한 탄산이 최후까지 남아 입안을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다. 온도를 살짝 높이니 신맛이 더 강해진다. 의외다. 보통은 술이 식으면 단맛이 강해지는데 복순도가 손막걸리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소주도 있고, 막걸리도 있는데 치킨은 왜 영혼의 파트너로 맥주를 선택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탄산이다. 치킨의 기름진 뒷맛을 깔끔히 씻어주기에는 강한 탄산이 좋다. 당연하다. 그럼 막걸리도 가끔 선택이 되어야 하는데, 치킨집에 소주는 있을지언정 막걸리는 없다. 단맛 때문이다. 맥주의 씁쓸한 홉의 풍미는 기름지고 고소한 치킨이 쉬이 질리지 않게 도움을 준다. 단맛이 강조된 막걸리는 치킨과의 만남에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들쩍한 단맛과 니글한 기름 맛의 동거는 상상만으로도 별로다. 대신 막걸리에는 맥주에 없는 산미가 있다. 탄산과 산미가 강조된 막걸리는 치킨과의 어울림에서 맥주를 능가한다. 복순도가 손막걸리가 그렇다.
셋째 잔
산미에 단맛도 녹아있고, 감칠맛도 녹아있다. 새콤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누룩향과 강한 탄산이 ‘새콤함’이란 단어를 붙이기엔 너무 강성이다. 차분해질 만도 한 셋째 잔인데도 목젖을 치는 탄산의 타격감은 여전히 힘이 좋다. 이 녀석의 풍미는 단양주 막걸리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강한 탄산에, 쿰쿰한 산미가 단양주 막걸리의 캐릭터다. 거칠지만 원초적 맛이 빚어진 단양주에 덧술 두 번을 거치면 곱고 진한 맛의 삼양주 막걸리로 거듭난다. 복순도가 손막걸리는 쿰쿰한 신맛과 강한 탄산까지 단양주의 모습을 꽤나 많이 닮아 있다. 역시나. 복순도가에 확인해 보니, 손막걸리는 이양주고 설탕은 발효력을 높이기 위해서 첨가했다고 한다. 막걸리의 원초적인 매력을 주조의 방향으로 잡은 것이다.
넷째 잔
맛의 지속력이 좋다. 잔이 거듭되어도 첫 느낌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탄산도 지치지도 않고 목젖에 타격을 가한다. 프리미엄급 가격에 이 녀석처럼 거친 캐릭터를 가진 막걸리는 없다. 찹쌀 함량을 높여 농밀하고 부드러운 단맛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막걸리를 주조하는 것이 프리미엄급 막걸리의 트렌드다. 느린마을 막걸리 한번더가 대표적이다. 이 녀석은 트렌드와 정반대의 개성으로 무장했다. 멋지다. 쿰쿰한 산미를 맛있게 조미했다.
한국 치맥 중흥의 배후에는 ‘라거’가 있다. 맛과 향이 진하고, 탄산이 약한 에일 계열의 맥주는 풍미가 막걸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반면 한국 맥주-카스, 오비, 하이트 등-의 주류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라거 맥주다. 풍미가 약한 대신 강한 탄산과 맑고 시원한 맛으로 먹는 맥주다. 당연히 치킨과의 궁합이 좋다. 하지만 시간에 약하다. 김 빠지고 식은 라거 맥주의 찝찔한 맛이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손막걸리는 이런 라거 맥주의 단점을 메워주는 좋은 대안이다. 그래도 시큼하고 누룩향 깔린 막걸리는 싫은 골수 치맥파들에게 조심스레 하나 더 소개한다. 달달하고 순한 막걸리로 유명한 지평 막걸리의 자매 브랜드다. 지평 이랑이랑이다.
지평 이랑이랑(춘천, 지평주조)
스파클링 막걸리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지평주조답게 5도의 낮은 도수에 레몬농축액과 허브류를 넣어 향미를 증진시킨 듯하다. 스파클링이니 탄산은 또 얼마나 많을까. 개폐를 3번 넘게 반복해도 열지 못하고 있다. 6번을 반복해도 거품이 병목을 치고 올라온다. 젊은 취향을 겨냥한 막걸리라고 짐작하며 한 잔 따라본다.
알코올 : 5도
원재료 : 정제수, 쌀, 자일리톨, 국, 효모, 레몬 농축액, 허브류
첫 잔
생각보다 달지 않다. 탄산은 엄청 세서, 향을 맡기 위해 잔을 가까이 되니 탄산이 눈을 톡톡 친다. 옅은 산미가 맛을 주도한다. 기운 좋은 탄산에 실려서 발랄하고 새콤한 기분을 입안에 넣어준다. 맑고 젊은 기운의 막걸리다.
둘째 잔
쿰쿰한 누룩향은 아예 없다. 산뜻한 산미의 향이 옅게 깔려있는 막걸리를 힘찬 기세의 탄산이 펌핑해준다. 원재료에 표기된 레몬 농축액은 좋은 선택이었다. 지평 특유의 강한 단맛을 레몬맛으로 제어하면서, 상큼한 산미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첨가된 허브류의 향이 막걸리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누룩향과 잡미를 제어하는 역할로 사용된 듯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 [산가요록(1450)]에는 치킨과 유사한 닭 요리법이 소개된다. 포계라는 음식이다.
포계
살찐 닭 한 마리를 24~25개로 토막을 내어둔다
기름을 넣고 그릇을 달군 후 토막 낸 닭고기를 넣는다
손을 빠르게 움직여 뒤집어 볶는다
청장과 참기름을 밀가루에 섞어 즙을 만들어 식초와 함께 낸다
맛이 느껴지는 조리법이다. 국뽕 세력들에게는 프라이드치킨도 한국의 고유의 음식이라 주장할만한 레시피다(프라이드치킨은 미국 남부가 고향이라는 것이 정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치킨과 포계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기름이다. 기름이 넉넉지 않고 귀했던 조선시대에는 기름을 넣어도 지금처럼 많은 양을 사용치는 못했을 것이다. 포계는 기름을 두르고 구워내는 방식이고, 현재는 기름을 ‘으악’스러울 정도로 많이 써서, 고기를 퐁당 빠트려 튀겨내는 방식이다. 즉, 포계는 구이고 치킨은 튀김이다. 책상다리를 튀겨도 맛이 있다고 할 텐데 닭다리를 튀기니 얼마나 맛있겠나. 문제는 느끼함이다. 포계 조리법 마지막 문단, ‘식초와 함께 낸다’도 닭구이의 느끼함을 상쇄하기 위한 방편이다. 중식 튀김요리에는 간장과 식초가 실과 바늘처럼 함께 한다. 이 역시도 기름진 맛을 달래기 위한 방법이다. 치킨에는 당연히 새콤한 치킨무가 기본이다. 식초, 즉 신맛이 치킨에는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산미 좋은 막걸리도 괜찮은 파트너가 아닐까. 더군다나 지평 이랑이랑은 탄산도 가득하고, 산미도 레몬맛을 기본으로 한다.
셋째 잔
젊은 층에서 선호할 요소들을 두루 갖춘 녀석이다. 안주 없이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텁텁함이 거의 없어, 마치 옅은 질감의 레몬 탄산수를 마시는 기분이다. 들이대는 단맛이 없는 점도 젊은 층에서 좋아할 특징이다. 단맛의 약하고 상큼한 산미가 주류를 이루니, 음식과 함께 하기에 부담이 없다. 특히 강한 탄산과 산미가 입을 헹궈주는 효과도 줄 수 있어, 본연의 음식 맛을 느끼기에는 더 좋은 막걸리다. 주연이자 조연이 될 수 있는 녀석이다. 트림만 잘 제어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넷째 잔
단맛은 극히 제어되어 있지만, 아주 드라이한 질감은 아니다. 약한 감칠맛도 숨기고 있다. 막걸리 애호가에게는 아쉬움이 많을 수 있지만 이 정도의 포용력을 갖춘 막걸리를 찾긴 쉽지 않다. 젊은이에겐 파티용으로, 중년에겐 잔치용으로 사용돼도, 막걸리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부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막걸리다. 치킨과는 더할 나위 없다.
국뽕의 관점에서 축구 보는 것을 개인적으로 참 싫어한다. 월드컵은 특히 그렇다. 세상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32개국의 축구 달인들이 모여 벌이는 게임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모두 재미있다. 물론 한국 축구가 제일 재밌지만 이기면 영웅이요, 지면 역적이 되는 국뽕 시선은 거부한다. 최고의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행복을 선사한 선수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축구를 즐거운 흥분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치킨과 막걸리에게도 감사할 따름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게는 축구가 있다” - 축구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아르헨티나)
승발이의 맛 평가 :
복순도가 손막걸리-강한 산미와 탄산의 어울림 속에 숨은 단맛이 좋다. 취향에 지나치게 강한 탄산의 기운이 거슬릴 수 있다. 4.3점(5점 만점)
지평 이랑이랑-레몬 탄산수를 마시는 듯한 라이트한 막걸리. 너무 가벼워서 이게 막걸리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4.0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탄산 강한 산미의 막걸리와 프라이드치킨은 꿈의 조합이다. 치킨을 막걸리와 엮고 싶지 않다는 골수 치맥파나, 치킨에 질린 사람들에게는 중식 닭요리인 유린기를 추천한다. 혹시나 거주 지역이 일산권역인 분들이나 맛을 위해서는 거리가 상관없다는 분들은 파주 은하장의 고기튀김을 강력 추천한다. 포장해와도 맛의 본질을 잃지 않으니, 축구 관람과 함께 하시길. 월드컵과 치막에는 흥겨운 디스코 음악이 어떨까. ‘한 장 남은’ 16강행 티켓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춤추고 싶은 기분이 들도록, 이룹션의 One Way Ticket-둘리스 Wanted-놀란스 I’m in the Mood for Dancing 메들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