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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해남, 데이비드 보위와 찹쌀 생막걸리 구도(삼산주조장)

승발이-백반기행 피디
- 24분 걸림 -

해창 막걸리는 도도하다. 막걸리 계의 신흥 명품이란 걸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타이밍을 놓치면 이마트에서도 조기 품절이고, 막걸리 전문점에서는 늘 최고가의 택을 붙이고 있다. 질 좋은 오겹살의 고소한 육즙과 꾸덕한 껍질의 식감에 맛 들이면 끊을 수가 없듯이, 한 동안 해창 막걸리의 새콤한 풍미와 보드라운 질감에 중독되었다. 6도, 9도, 12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에 정신을 못 차렸다. 여름까지는. 이제는 잊을 수 있다. 늦가을, 해창 막걸리의 고향인 해남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나의 히어로, 찹쌀 생막걸리 구도다.

알코올 : 9도

원재료 : 정제수, 찹쌀, 멥쌀, 국, 누룩, 젖산


해남은 멀다. 땅의 끝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땅끝에는 커피 거름망 끝에 알갱이가 모이듯, 이 땅의 알갱이들이 모여있다. 붉은 흙이 품어 키운 질 좋은 야채와 푸른 바다의 생명 머금은 해산물은 소박한 밥상을 넉넉한 맛으로 가득 채운다. 풍경도 다채롭다. 겨울 시금치가 푸릇한 황토밭의 물결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도솔암의 영험한 기운을 보듬은 달마산은 웅장한 바위 능선을 보여주고, 송호 해수욕장의 황금빛 고느적함은 가녀린 시골 처녀의 은은한 미소를 닮았다. 한 발 더 나아갈 곳이 없어 좋은 것들을 모다 쟁여놓은 듯한 해남에서, 늦가을의 풍광은 두륜산에 모아 놓았다.

해남은 멀다

두륜산의 대흥사로 향하는 장춘동 숲길 단풍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확연한 다름으로 물들어 있다. 두륜산 상가들이 모여있는 초입 길의 주홍빛 단풍 물결이 화려함으로 스쳐가면, 본격 장춘동 숲길의 노르스름한 옅은 오렌지 빛깔이 녹음에 섞여 물결친다. 사철 푸르른 동백잎이 단풍과 어울려 곧게 뻗은 길의 각선미를 수놓는다.  달콤하고 노란 푸르름이 따뜻하면서도 싱그럽다.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색들의 공존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 시간과 공간을 붙잡고 싶은 덧없는 욕망이 심장을 두드린다. 잡을 수 없는 헛된 욕심임을 깨닫는 가슴이 헛헛해진다. 이렇게 가을을 타게 된다. 장춘길 마무리에 한국 최초의 여관인 유선관의 키 작은 돌담길을 지나 피안교에 다다른다.

‘피안교라. 저 다리를 건너면 고통과 불행, 세상의 번뇌 따위는 없는 또 다른 세계로 간다는 건가. 멋진데’

1974년에 준공되었다는 투박한 시멘트 다리인 피안교를 건너, 현실 넘어 해탈과 열반의 저 쪽 언덕으로 걸어간다. 피안교를 넘어서자 화려했던 단풍의 색감이 갈색의 소박함으로 바뀐다. 반듯히 포장되어 있던 도로가 수수한 흙길 언덕으로 이어진다. 덤덤하게 한발, 한 발을 내딛는다. 호흡이 살짝 차오를 즈음에, 내 옆을 나란히 걷고 있는 노란색 머리의 외국인이 보인다. ‘이 사람은 언제 내 옆에 있었지?’

푸르스름한 아르마니 풍의 정장에 노타이의 코발트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검은색 발리 가죽 구두를 신은 60대 후반의 이방인이다. 묘하게 낯이 익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세련된 턱선에 날 선 콧날. 파스텔 펜으로 섬세히 그려놓은 듯한 입술. 입체감 있게 빛나는 이마 위엔 노오란 맥주 빛 머릿결이 나풀나풀 흩날린다. 멋지게 그어진 주름살 사이로 지혜로워 보이는 두 눈이 반짝인다. ‘아하.. 이 잘생긴 백인을 어디서 봤을까’ 고민하는 순간, 미소 짓는 그의 눈과 마주친다. ‘어라.. 이 짝짝이 눈동자..’

“아저씨.. 혹시 데이비드 보위.. 맞아요?”

“반갑군, 친구”

오 마이 갓. 데이비드 보위다. 팝 문화사 최초로 페르소나, 요즘 말로 부케를 창조한 천재 뮤지션. 보위가 지금 내 옆에서 미소 짓는다. 피안교 넘어 저 세상이 열린 건지, 저 세상 넘어 이 사람이 온 건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부케의 창시자, 스타들의 스타, 잘생긴 팝의 혁명가, 데이비드 보위라는 거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당신 저 세상의 블랙스타가 된 지 몇 년 됐잖아요”

“가끔 이런 일도 있어야 재밌지. 피안에서 온 지기(Ziggy)라고나 할까”

정확히 50년 전이다. 1972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라는 앨범을 발표하고, 데이비드 보위는 본인이 화성에서 온 록스타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라며 활동을 시작했다. 대중음악의 세계에 등장한 보위의 페르소나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뭔 소린지 잘 모르겠고요. 쉽게 말해 귀신이란 말이죠?”

“음... 그래.. 그런가.. 그냥.. 형이라고 불러라”

데이비드 보위 귀신, 아니 보위 형하고 두륜산을 향한다. 한발 떨어져 지켜보면 참 공포스러운 장면인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낯선 존재와 함께 한다는 두려움이 없다. 평온하다. 고즈넉한 산사의 편안함으로 귀신 보위 형과 동행을 한다. 사부작사부작. 흩뿌려진 낙엽을 밟으며 산사로 향하는 발길은 맑고 가볍다. 보위 형과 해탈문을 지난다. ‘귀신이 해탈을 하면 뭐가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지나갈 무렵, 두륜산을 배경 삼은 가람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가 막히다. 나는, 아니 우리는 또 다른 경계를 넘어서 있었다.

“친구, 한국의 템플들은 죄다 이런 초현실적 경관을 품고 있나?”

“아니요. 아니에요. 야.. 여긴 정말 환상이네요”

대흥사에서 바라본 두륜산

누운 활처럼 길게 뻗은 능선이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어진다. 늦가을 단풍으로 물든 산세를 배경으로 자리한 가람의 지붕 곡선과 두륜산의 능선이 어우러져 포근한 영원의 공간감을 이룬다. 오심재와 만일재의 부드러운 능선이 마주한 곳에 우뚝 솟은 노승봉과 가련봉의 바위 봉우리는 영험한 기운을 뿜는다. 웅장하지만 압도하지 않는다. 따뜻함으로 물든 산세가 대흥사와 우리를 포옥 감싸 안는다. 비현실적 아늑함에 멍하니 늦가을의 두륜산을 바라만 본다. 포근하다.

“내가 53년 전에 여기에 있었으면, [Space Oddity]가 아니라 [Temple Oddity]를 불렀을 거야. 톰 소령은 이런 비현실적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거야. 모든 걸 잊는 외로운 평화를 위해서라도”

“으음, 형은 원래 좀 철학적이에요?” “철학적?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난 그저 재밌는 게 좋아. 아, 책은 엄청 많이 읽었지. 있어 보이잖아”. 잘난 척하지 않아도 보위 형은 충분히 잘나 보이니 말이라도 쉽게 했으면.

보위 형의 노래 안에서 우주 미아가 되는 톰 소령이 아니더라도, 두륜산은 오르고 싶어 진다. 이토록 보드라운 품 안에 안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젊은 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구마구, 지겨울 정도로 안겼었던 보위 형도 예외는 아니다. “친구, 한번 올라 가볼까”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모신 북미르암을 넘어, 천년을 살았다는 천년수에 감탄하며, 억새풀이 바람결에 춤을 추는 만일재를 지나니 두륜산 정상 가련봉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남은 다채롭다. 붉은 밭에 녹색 시금치가 어우러 지고, 미처 추수 못한 늦가을 논의 누런 기운이 푸르디푸른 남해 바다와 마주한다. 햇살 좋은 정상의 시야는 지루할 틈이 없는 풍광이다. 저 멀리 대흥사가 풍만한 어머니의 뱃살 끝자락에 자리 잡은 배꼽처럼 보인다. 누가 봐도 명당이다.

“어이 친구. 우리 한번 날아볼까” “네? 굳이.. 왜?”

“재밌잖아”, “재미 땜에 삶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네요”

“산을 따라 펼쳐진 단풍 스펀지를 봐. 폭신할 거 같지 않아. 글래머스한 단풍 숲을 향해 점프하는 거야. 톰 소령처럼”

햇살 번진 노랗고, 빠알간 산자락을 바라본다. 대륜산 자락을 따라 둥글둥글한 단풍 물든 융단이 폭신하게 쌓여있다. 파스텔 톤으로 색 입혀진 동그란 스펀지를 몽글몽글 도톰하게 깔아 놓은 듯하다. 정상의 높이가 대략 700m. 이 정도 높이면 훌쩍 날아 떨어져도, 풍성한 단풍 쿠션이 편안하게 나를 안아주리라.

“한번 날아 볼까요. 믿어도 되죠?” “친구, 나를 못 믿나. 내가 누군지 몰라?”

“잘 알죠. 귀신...”. “왓?..”. “아니에요. 어떻게 날면 돼요?”

두륜산 정상 가련봉에서 보위 형을 따라 점프를 한다. 양팔을 날개 펴듯 벌리고, 통하고 발끝에 힘을 준다. 남해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결에 실려 둥실 몸이 떠오른다. 그래 날자, 날아보자꾸나. 훌쩍. 가을 햇발이 펼쳐진 대륜산의 단풍 숲을 향해 몸이 유영을 한다. 산에서, 바다에서, 들녘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온몸의 촉감을 어루만진다. 시원하다. 왕벚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차나무, 이런저런 예쁜 나무들의 화려한 컬러 쿠션 위로 몸이 떨어진다. 천천히.  투~~ 웅~~. 그네를 타듯 다시 날아오른다. 배꼽 주변이 간질간질하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몸도, 머리도, 마음도 투~웅~하고 공중을 떠다닌다. 무중력 공간을 떠도는 우주인이 된 것만 같다.

“푸하하하하하. 우와 죽인다. 보위형, 단풍들이 내 몸을 튕겨 날려요. 정신이 나간 거 같아. 우하하하하”

“너 같은 친구들을 뭐라고 하는지 아니?”, “몰라요. 깔깔깔깔깔”, “우주 또라이(Space Oddity)”.


​​​​​​And I'm floating in a most peculiar way

그리고 난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떠다니고 있군요

​And the stars look very different today

오늘따라 별들이 정말 달라 보입니다

​For here

여기서 보기에

​​Far above the world

세상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있어요

​Planet Earth is blue

지구는 푸르고

​And there's nothing I can do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 데이비드 보위, [Space Oddity] 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긴요. 한잔 해야죠 형님. 해남 막걸리 걸지게 한 사발 하러 갑시다. 보위 형님. 아르마니 슈트빨 만 죽이는 게 아니에요. 이 동네 막걸리 맛도 기가 막힙니다. 훨훨 날아 어여 갑시다, 형님.

두륜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흥사

해남은 지금 막걸리 삼국지가 한창이다. 해남에서 가장 큰 하나로 마트 막걸리 매대를 가보면 알 수 있다. 타 지역 막걸리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해남 지역 막걸리만 있다. 해창 막걸리 6도, 9도, 12도 3종. 옥천 주조장의 옥천 막걸리와 송우종 황금주 막걸리(13도) 2종, 삼산 주조장의 찹쌀 생막걸리 6도, 9도, 12도 3종. 이게 다다. 8종의 막걸리만 있다니 좀 빈약한 거 아닐까라는 생각. 당연히 들지만 너무 걱정 마시라. 그럴만하니까 마트도 요 놈들만 팔고 있는 것이다. 보위 형과의 막걸리로는 삼산 주조장의 찹쌀 생막걸리 구도를 선택했다. 해남의 한정식 명가 한성정에서 마시기 때문이다.

“와우. 이 집 정말 멋지군. 살구색, 녹색, 노란색, 보라색에 주홍색 글씨가 포인트로 들어가 있어. 레트로 감성이 색감에 고스란히 녹아있어. 크랙이 생긴 간판을 보라고. 아름다워 아름답다고. 여긴 뭐하는 곳이지? 살롱인가, 박물관, 패션 하우스? 도대체 여긴 어딘가 친구?”

“밥집이요”

해남 맛의 명가 한성정. 레트로 그 자체다

남도에 처음 온 지인들에게 나는 종종 한정식을 추천한다. 바다와 땅의 풍부한 먹거리가 식탐을 충족시키기에도, 다양한 반찬으로 일상의 맛을 접하기에도 좋다. 특히 첫 경험인 경우, 맛의 기준을 남도 한정식으로 세운 후 미식 여행을 하면 식도락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보기는 좋은데 불편하군” 온돌방에 양반다리로 앉으려니 보위형이 불편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 이게 남도식 한정식이다. 정갈한 코스식 도심의 한정식이 아니다. 창호지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주머니 두 분이 해남의 진미가 올려진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Awesome”.  보위 형의 깊은 눈에 놀라움이 가득하다.

“이 많은 음식을 한꺼번에 어떻게 다 먹지. 식으면 맛이 없잖아. 많아도 너무 많아. 하나씩 주면 안 되나? 이건 부담되는걸”. “음.. 보위 형. 로마에 가면 어쩌야 되죠?”. “소매치기를 조심해야지”. “아.. 네.. 일단 천천히 하나씩 먹어봐요. 이것도 여기 문화니까”

떡갈비를 필두로 숭어 숙성회, 홍어, 조기구이, 전복회, 육회, 회무침, 보쌈, 계란찜, 버섯 탕수, 호박전, 토하젓, 시금치, 김치, 묵은지, 김국, 흰쌀밥까지. 해남에서 나오는 웬만한 맛은 모두 상위에 올라와 있다. 한국 사람도 당황할 수 있는 밥상의 포스에, 낯선 저 세상 이방인이 당혹스러운 건 당연한다.

‘뭐부터 먹는 게 좋을까”, “글쎄요. 육회? 회무침? 빨갛고 찬 음식부터 시작해 봐요” “Awesome. Awe~some” 보위 형 눈이 진심이다. 한성정 음식은 간이 좋다. 양념 맛이 좋지만, 짜지 않다. 회의 숙성 정도도 좋고, 고기의 익힘 정도도 훌륭하다. 상 위의 많은 음식을 돌아다녀도, 각각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짠 기운과 단맛으로 입안이 찌들지 않는다. “이봐 친구. 이건 무슨 치즈지. 아주 새로운 맛인데”. “된장이요. 콩을 발효시킨 거예요. 좋은 된장은 뒷맛이 치즈 같다고 하지요”. “놀랍구먼”

놀라운 맛들의 연속이다. 조연으로 나온 반찬도 주연의 맛을 내니, 쉬어갈 공간이 없는 꽉 찬 밥상이 된다. 그래서 한성정에서는 해창 막걸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는 해남의 고구마만큼 유명해진 해남의 해창 막걸리다. 전국구의 지위를 획득한 해창 막걸리는 찹쌀의 진한 맛이 일품이다. 단맛과 산미의 걸쭉한 조합과 9도, 12도의 막걸리로는 높은 도수는 전국 술꾼들에겐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로큰롤 월드를 침공한 데이비드 보위의 지기 캐릭터처럼. 워낙 진한 막걸리여서 해창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다. 무게감 있는 안주가 해창 막걸리와 만나면 종종 궁합이 무너지곤 한다. 너무 헤비한 어울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성정에는 해창 막걸리가 없다. 삼산 찹쌀 생막걸리가 준비되어있다. 9도, 12도는 미리 주문을 해야 된다.

“보위 형. 한잔 해요. 막걸리는 처음이죠?”, “흥미로운 색이네. 이렇게 탁하고 누런 색의 술은 첨이지. 리큐어 종류인가?”, “한국식 맥주라고 보면 돼요. 치어스”. “치어스”

삼산 막걸리와 남도 한정식

첫 잔

미리 주문한 삼산 찹쌀 생막걸리 구도(9도)로 시작한다. 새콤하다. 섬세한 단맛이 더해진, 맑고 시큼 새콤한 멋진 맛이다. 찹쌀막걸리의 걸쭉함은 없다. 맑고 시큼달달한 녀석이 부드럽고 청명하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맛있다. 참 맛있는 막걸리다. 단맛, 신맛과 탄산의 조화로움이 아주 좋다. 부담 없는 깔끔함으로 입을 정리해준다.

“막걸리 어때요?”.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맥주처럼 보리로 만든 술인가?”. “쌀로 만든 술이죠”, “은은하지만 선명한 단맛이 산미와 아주 재미있게 마주하고 있군. 그럼에도 쌉싸름함을 놓치지 않아. 술임을 뽐내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느끼게 만들어. 특히 풍성한 음식과의 어울림이 좋구만. 부담이 없어”. 이 형 보소. 완전 미식가 구만.

음식과의 조화로움은 해창보다 이 녀석이 확실히 한 수 위다. 해창이 화려한 솔리스트라면, 삼산은 밴드의 베이시스트다. 도드라지지 않고 스며든다. 해남은 도대체 어떤 땅이길래 막걸리도 이리 맛있단 말인가.

“근데 이 술을 색으로 표현하기는 참 어렵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음식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색을 가졌는데, 막걸리라는 술은 그렇지 않아. 자기 색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직접적이지 않아 다중적이야. 묘해”.

둘째 잔

게미지다. 전라도 방언으로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 생각나는 맛이라는 뜻이다. 감칠맛이 있다는 의미다. 이 녀석은 확실히 ‘게미진’ 막걸리다. 한방에 뒤통수를 빡하고 후려 갈기는 센 캐릭터는 아니지만, 마실수록 더 손이 가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 깔끔하지만 입안을 감싸는 감칠맛이 풍요로운 술맛을 선사한다.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도 게미진 매력이 있다. 보이는 이미지는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포크와 로큰롤에 기반했던 초기 음악 작품은 들으면 들을수록 끌리는 맛이 있다. 상상의 여백이 있는 순한 맛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다.  모든, 지레짐작해서 판단할 일은 아니다. 그의 음악도 묘했다.

셋째 잔

이 녀석은 반 통 마신 후 하루 묵혔다가 마셔도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개봉 후 하루 지나서 마시면 확실한 산미를 느낄 수 있다. 산소를 맞이해 살짝궁 발효가 더 진행되어 산미가 높아진 탓이다. 효모가 살아있다는 의미다. 생동감 가득한 막걸리다. 어른들을 위한 요구르트를 만든다면 딱 이 맛이다. 아껴 먹으면서, 자가 숙성시키는 재미가 있는 막걸리다.

“근데 형을 보면, 참 멋있고, 대단해. 그리 막살던 사람이 말이야. 어떻게 그래”, “무슨 말이지? 친구”. 술이 오르면 무턱대고 용감해진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고야 만다. “아니. 왜 있잖아. 본인이 난잡했다고 인정했잖아요”

젊은 시절, 문란하게 막살았던 데이비드 보위였다. 스스로 본인이 동성애자다, 아니다 양성애자다, 잠깐 실수했었다, 이성애자다라고 말했던 그였다. 한 때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도 그의 파트너라는 말이 파다했으니. ‘난 그저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적으로 문란했었다. 인정하니까 이제 그쯤 해두면 좋겠다’라고 스스로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사람이 1992년 두 번째 결혼을 한 후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적 추문은 사라졌고, 1994년에 얻은 어린 딸을 보살피는 즐거움에 수년간 은둔 생활을 했을 정도였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만 존재했던 보위의 중장년이었다. 막걸리만 숙성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봐 친구. 초면에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미안해요. 취했나 봐요”.


넷째 잔

풍만하고 게미진 막걸리의 풍미가 농후하다. 이런 녀석의 맛을 표현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하나가 뾰족한 녀석들은 그 뾰족함을 중심으로 표현하면 되는데, 균형감이 좋은 막걸리는 구성진 맛의 종합판이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잘못하면 두리뭉실해지고, 자칫하면 뭔 맛인지 모를 설명이 된다. 그래서 그저 ‘맛있다’를 반복하게 된다. 이 녀석 참 맛있다.

“막걸리 맛은 대부분 이런가?”, “이 정도면 A급이죠. 에일 계통의 밀맥주를 마시면, 빛깔은 탁하지만 깊고 풍부한 맛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그런가? 마실만큼 마셔봤지만, 이런 술은 처음이야. 단맛과 신맛이 술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잖아. 이건 미라클 해”. 이 양반, 빠져들고 있다.

“어때요? 나랑 막걸리 여행 좀 다녀 볼래요?”, “Lovely! 나 왠지 사랑에 빠질 거 같아”, “네? 저는 좀..”, “Fxxk, 너 말고 막걸리”.


And I, I’ll drink all the Time

그리고 난,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있을 거야

‘Cause we’re Lovers, and that is a fact

왜냐면 우린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건 사실이야

— 데이비드 보위 [Heroes] 중에서


승발이의 맛 평가 : 지금 해창 막걸리와 삼산 찹쌀막걸리 중 선택을 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삼산 찹쌀막걸리 구도를 선택한다. 맑고 풍요로운 맛의 막걸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가격이 해창 막걸리의 반값이다. 가성비 갑이다. 4.7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해남 한성정 음식은 간이 좋다. 양념을 넉넉히 쓰지만, 짜지 않고 재료의 맛을 가리지 않는다. 양념이 재료와 어우러져 풍성한 맛을 선사한다. 삼산 찹쌀막걸리 구도는 간이 좋은 음식과 함께할 때 위력을 발휘한다. 풍성한 맛을 보드랍게 감싸고, 맑게 정리해준다. 입을 가볍게 만들어, 식욕을 보듬는다. 과식, 과음을 조심해야 한다.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를 곁들이자. 맛이 주는 감동의 폭이 우주적으로 넓어질 터이니.

https://youtu.be/iYYRH4apXDo

참고자료

  • 쏘운 샤아인 네이버 블로그
  • 인포그래픽 데이비드 보위(리즈 플래벌)
  • 더 컴플리트 데이비드 보위(니콜라스 페그)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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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발이-백반기행 피디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CP(책임 피디)로 전국의 맛깔나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을 하던 중 막걸리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