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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맛과 술 1 - 단짠의 조화, 옥돔과 빙떡

조승연 PD
조승연 PD
- 8분 걸림 -

제주도 출신 방송작가인 A작가에게 "제주도니까 회 좋아하겠다"라고 물으면 한결 같이 "난 중산간 지역 출신이라 회를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섬이니까 생선 많이 먹었을 것 아니냐고 물어보면 그건 육지 사람들의 편견이라며 본인은 회보다 고기를 좋아한다고 딱 잘라 말을 하죠. 그러다가 한 참을 생각해 보고는 "아, 옥돔. 제삿날 먹는 옥돔은 너무 맛있죠. 빙떡 하고 같이 먹으면 입에서 짭조름한 게 아주 입에서 살살 녹아요"라고 합니다. 이거 만한 생선 맛은 없다며 말이죠. 옥돔과 빙떡. 제주의 맛과 술에서 소개하는 첫 번째 메뉴입니다.

빙떡과 옥돔 구이

15년 전에 지금은 해군 기지로 변한 제주 강정마을에 옥돔을 촬영하러 갔었습니다. 수년에 걸친 해군 기지 반대 데모를 하는 지역민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강정마을 포구에서 배를 타고 20여 분 정도를 달려 제주의 푸른 바다에 주낙을 던지고 옥돔을 기다렸죠.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옥돔이 한 두 마리 낚이기 시작했습니다. 푸르른 바다를 뚫고 올라온 선명한 분홍빛의 물건이 배 위에서 파닥되고 있었습니다. 툭하니 절벽처럼 꺾인 머리가 순박한 인상과는 달리 연분홍 살빛이 주는 영롱함은 경이로울 정도였죠. 뭉툭한 코를 가진 구수한 인상의 총각이 분홍빛 베르사체 정장을 입은 느낌이랄까요. 하여튼 서민의 밥상에 흔히 올라가는 고등어, 꽁치, 삼치, 임연수어, 명태 등등의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외모였습니다. 햇살 좋은 제주의 풍광이 육지와 다르듯이 말입니다. 맛도 물론 다른 차원이지요.

6시 내 고향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주인공 식재료가 있으면 보통 3~4가지 요리를 선보이곤 하죠. 가령 주인공이 낙지면 낙지 탕탕이, 낙지 연포탕, 낙지 호롱구이, 낙지숙회, 낙지볶음 등의 요리를 상위에 깔아놓죠. 하지만 옥돔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현지 주민분들에게 여쭤봐도 답은 하나죠. "옥돔은 구워 먹어야 최고로 맛나. 국을 끓여도 맛있지만 그래도 구워 먹는 것만 못하지". 옥돔은 살이 엄청 연합니다. 회를 치면 살이 축축 처질뿐 씹는 맛을 느낄 수 없죠. 갓 잡아 올린 옥돔을 소금 간만 살짝 해서 구워냅니다. 솔솔 피어오르는 김에도 맛이 배어있는 듯합니다. 뽀얀 살을 한 점 입에 넣으면 은은하고 깊은 단맛이 혀 위에 부드럽게 퍼지죠. 비린 맛이요? 그게 뭐죠? 옥돔에게 물어볼 질문은 아닌 듯한데요. 외모부터 맛까지 옥돔을 영물이 맞습니다. 이런 영물을 조상님들 몰래 먹을 수는 없는 법이죠. 차례나 제사, 잔치가 열리면 항상 준비해야 할 것이 바로 옥돔이었습니다. 호남에서 홍어를, 영남에서 문어를 올리듯 말이죠.

제주 옥돔에게는 영혼의 파트너가 있습니다. 빙철(번철)에 지져서 빙빙 돌려 만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빙떡입니다. 일종의 제주식 메밀 전병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흔히 먹는 메밀전병 속에는 진한 맛의 김치가 고명으로 들어가지만, 제주 빙떡에는 무맛에 가까운 무채가 속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죠. 흘러내릴 정도의 메밀 물반죽을 둥그렇게 부쳐내고 그 위에 양념된 무채를 올려 빙빙 말아놓으면 끝이 빙떡은 제주도 제사 음식에도, 결혼식 잔치 음식에도 당연히 한 자리 차지합니다. 옥돔 옆에 말이죠. 왜 화려함의 끝인 옥돔 옆에 소박하기 그지없는 빙떡이 자리를 차지할까요? 먹어보면 압니다. 물 좋은 옥돔을 오래 두고 먹으려면 소금 간간하게 쳐서 반건조 상태로 만드는 게 최고죠. 덕분에 옥돔 살도 숙성이 되어 감칠맛도 올라오고요. 아쉬운 건 생물보다 맛이 짜다는 건데 그럴 때 영혼의 파트너인 빙떡의 위력이 발휘되는 거죠. 짭짤한 옥돔 살 한 점하고 담백함을 넘어 심심한 빙떡 한 입을 베어 뭅니다. 제주사람들이 그러듯이요. 아, 참 좋습니다. 메밀과 무의 수수함은 옥돔의 감칠맛을 해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맛을 지켜주죠. 대신 간간함을 중화시켜 줍니다. 그렇다고 옥돔이 빙떡에게 받고만 있지는 않죠. 옥돔의 짭조름한 맛은 빙떡이 숨겨놓은 단맛을 꺼내줍니다. 메밀과 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순박한 식재료죠. 부끄러움도 많아서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단맛을 꽁꽁 숨겨 놓습니다. 메밀과 무의 단맛은 은은하거든요. 은은한 단맛이 보이도록 하는 데는 짠맛이 아주 좋죠. 냉면 육수처럼 말이죠. 옥돔 덕분에 빙떡은 부끄러움을 털고 수수하고 은은한 진짜 단맛을 보여준답니다. 망자를 위한 잔치인 제사든, 산자를 위한 잔치인 결혼식이든 잔치에 술이 빠지면 섭섭하죠. 옥돔과 빙떡엔 역시나 차좁쌀로 빚은 오메기술입니다. 탁한 술빛 속에 진하게 담긴 시큼 달큼한 맛은 입을 개운하게 씻어주고 속을 후끈하게 달궈주죠. 제주도 토박이신 강경순 명인이 정성스레 담근 오메기술은 거친 겉모습과는 달리 깔끔하기까지 하죠. 명인이라는 호칭이 거저 붙은 게 아님을 술맛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뭐 다른 조합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옥돔엔 빙떡, 그리고 오메기 술 한 사발. 제주도 맛의 잔치 완성입니다.

옥돔은 화려합니다. 빙떡은 수수하죠. 오메기술은 거칠고 투박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잔치는 기쁜 일이 있을 때에 음식을 차려 놓고 여러 사람이 즐기는 일이라고 하네요.  화려하거나 수수하거나 혹은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함께 모여 행복하면 된 거 아니냐는 의미인 거죠. 옥돔과 빙떡을 같이 먹으며 오메기술을 마시는 제주도 사람들 참 현명했네요. 지금부터 뭍사람들도 따라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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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PD

맛&막걸리 콘텐츠 PD. TV조선에서 제작부장으로 [살림9단의 만물상], [애정통일 남남북녀], [모란봉 클럽], [시골빵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제작.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CP(책임 피디)로 전국의 맛난 음식 & 막걸리와 사랑에 빠져버림. 현재는 맛과 막걸리와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프로듀서로 열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