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스러운 포졸의, 기찰 생탁주(부산산성양조)
늦어짐에 이유가 있을까? 적어도 매주 한 편 이상은 올리리라 굳게 했던 새해 다짐이 1월에 무너져 버렸다. 마시기만 꾸준히 마시고, 2월 하고도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궁색하게 끄적여본다. 솔직히. 대단한 글을 쓰고 싶었다. 멋진 비유와 상징이 막걸리 맛과 교차되는 그런 글. 잘빠진 글로 잘난 체하고 싶었다. 김훈의 ‘젊의 날의 숲’처럼 비유하고 싶었다. 절망이었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그’처럼 코믹한 서사를 그리고 싶었다. 좌절이었다. 감히,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싶었다. 미쳤었나 보다. 스스로 과대평가한 글빨에 실망하며, 자판과 메모만 뚫어지게 바라보다 시간을 말아먹었다. ‘대단한 막걸리를 마셔야 글이 술술 풀릴텐데’라며 늦어짐의 이유로 막걸리 탓을 하고 있었다. 돌았었나 보다. 쉽게 도달하지 못할 대단함을 꿈꾸느라, 범인이 대단함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꾸준함을 내동댕이 처 놓고 있었다. 부산의 기찰 생탁주도, 메모 저편에 묻혀있었다. 싸다는 이유로. 내가 무시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알코올 : 6도
재료명 : 물, 쌀, 밀가루, 물엿, 국, 효모, 정제효소, 젖산, 종국, 아스파탐, 아세설팜칼륨
‘기찰’이란 부산 부곡동의 옛 지명으로 지금의 검문소(기찰방)를 의미하는 곳이라고 한다. 지하 암반수가 좋아 술맛이 좋다고 쓰여있다. 보통 원재료명에 정제수라고 표기하는데 기찰 생탁주는 ‘물’이라고 적혀있다. 오래된 양조장일 거다. 익살맞은 포졸 캐릭터 위에 ‘since 1928’이라 쓰여있다. 95년을 버틴 1,900 원 저가 막걸리다.
첫 잔
시큼한 향이 올라온다. 향에 비해 맑고 부드럽게 입을 적시고 넘어간다. 옅은 단맛과 얇은 산미가 잔잔한 탄산에 버무려 저 있다. 상당히 달거나 시큼한, 편향되고 과장된 맛을 담은 막걸리일 거라 예상했는데 굉장히 젠틀하다. 편안하고 균형 잡힌 술맛이 입안에서 점잖게 머무른다. 솔직히 이 정도의 막걸리일 줄은 몰랐다. 뻔하디 뻔한 싸구려 녹색 페트병에 담긴 그저 그런 단맛의 술일 거라 짐작했다. 겉모습만 보고 짐작했다. 나의 건방진 편견을 부숴버린 기찰생탁주의 첫 잔이 감사하다.
둘째 잔
탁주라는 이름과 달리 부드럽고 맑은 술맛이다. 단맛과 산미의 은은한 발라스가 아주 좋다. 부산이라는 강한 지역색을 생각해 단순한 안주를 선택했다. 집고추장과 마른 멸치. 맵고 짭조름한 안주를 함께하니 막걸리의 단맛이 살며시 올라온다. 보드라운 단맛이다. 끼를 부리지도, 나대지도 않는 차분한 단맛이다. 길게 남지 않고 슬며시 사라진다. 산미가 입천장에서 돌며 목젖을 간지럽힌다. 깔끔하게 넘어간 녀석이 속을 천천히 덥혀온다.
부산하면 생각나는 막걸리는 단연 금정산성 막걸리다. 족타로 직접 만드는 누룩도 유명하고, 시큼한 8도의 술맛도 아주 좋은 전국구 막걸리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막걸리는 금정산성 막걸리가 아니다. 부산 생탁이다. 서울 장수 막걸리처럼 부산지역 양조장 조합인 부산합동양조의 막걸리여서 유통망이 강력하다. 실질적 부산-경남의 주류 막걸리는 생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기찰 생탁주는 부산의 언더독이다. 1970년 경쟁력 제고라는 명목하에 부산 지역 40여 개 양조장이 통합되었다. 생탁을 만드는 지금의 부산합동양조의 시작이다. 기찰 생탁주를 만드는 부산산성약주의 전신인 부곡양조장도 그 당시 통합되었다. 1971년 부산약주양조공사라는 명의로 재창업하여 부산 지역은 약주만 유통하고, 막걸리는 수출용으로만 만들었다고 한다. 1979년에 부산산성양조공사로 사명을 바꾸고, 2002년부터 부산-경남 지역에 막걸리를 재출시하게 됐으니, 통합된 거대 양조장 밑에서 눈치 보다가 다시 막걸리를 유통시킨 지 이제 22년째다. 버티고 버텨온 막걸리다.
셋째 잔
맑은 맛 속에서 술을 품고 있다. 쌉싸래한 술맛이 거의 없고 탄산이 약해 벌컥벌컥 쉽게 마실 수 있지만, 확실한 ‘술’을 이 녀석은 품고 있다. 지역 막걸리의 일반적 특징 중 하나가 뒷맛에 남는 인공 감미료의 씁쓸함인데, 기찰 생탁주는 뒷맛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향이 입천정 뒤쪽에서 돌다 사라지기 때문에, 입안에 남는 잔 맛이 없다. 깨끗하게 마무리되는 막걸리다. 아주 흐리게 레몬수의 맛이 남는다. 좋다.
버티고 버티면 좋은 시절이 올까? 2002년, 전철 4호선 초지역(예전 이름 공단역) 부근은 안산 내에서도 낙후된 지역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바라본 초지역 연립의 풍경은 ‘야~ 아직도 이런 곳이 있네. 70년대 배경의 누아르를 찍으면 딱이겠다’였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4층 회색 연립의 1층에는 미닫이 문의 어두운 상점들이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나름 수도권이었지만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싼 가격으로 매매가 가능했던 곳이었다. 여기서 버티고 버티는 사람들은 누굴까 궁금도 했었다. 2023년, 그 사람들은 지금 가장 핫플에 살 사람들이었다. 연립주택 자리에 안산에서 가장 비싼 대단지 신축 아파트가 들어섰고, 초지역은 4개 노선이 지나가는 핫스테이션이 되었다. 기찰 생탁주도 버티고 버티면 초지역 부근처럼 좋은 시절이 올 수 있을까?
넷째 잔
차분한 술맛이 여전하다. 호흡하며 마시니 입안을 적시는 순간 약한 화학 감미료의 맛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짧게 사라진다. 부드러운 균형을 담은 젠틀한 막걸리를 만났다. 외모와 맛이 너무 다른 녀석이다. 덕분에 반전의 매력이 있다.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는 족타 누룩이라는 강력한 시그니처가 있다. 생탁은 50년 넘게 다져온 조합의 유통망이 있다. 자그마한 양조장의 기찰 생탁주의 시그니처는 무엇일까? 좋은 술맛이지만, 강력한 시그니처로 논하기에는 술맛이 너무 점잖다. 개성이 약하다. 이 녀석의 강력한 임팩트는 의외로 외모에 있다. 익살맞은 포졸 캐릭터가 가장 인상적이다. 길창덕 선생의 ‘꺼벙이’와 윤승운 선생의 ‘두심이’을 절묘하게 믹스해 놓은 듯한 포졸 캐릭터는 적어도 막걸리계에서는 독보적이다. 아직까지 인상적인 캐릭터로 대표되는 막걸리는 만나본 적이 없다. 귀엽고 익살맞기 그지없는 포졸 캐릭터는 언더독 기찰 생탁주의 버티기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늘 함께해서 잊고 지내기 쉬운 작은 일상에 멋진 가치가 종종 숨어있다. 버티고 또 버티며 살아온, 일상이라 불려지는 시간의 끈적한 퇴적물은 감사히도 보물을 품고 있다. 어쩌면 버텨야 살 수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사소함의 힘이다. 기찰 막걸리의 기가 찬 포졸 캐릭터의 능청스러운 웃음은, 참으로 맛깔스럽다. 점잖은 막걸리 맛에 반전의 스토리를 입혀줄 수 있는 사소하지만 강한 힘이 될 수 있다. 내가, 당신이,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소함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버티고 버텨 먼 꿈결 같은 시절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승발이의 맛 평가 : 촌스럽고, 뻔한 디자인에 새겨진 익살스러운 포졸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맛. 젠틀하다. 4.2(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영등포 경찰서 사거리에 포항물회라는 자그마한 노포가 있다. 막회와 문어, 곰치탕 등을 파는 막걸리 마시기 좋은 집이다. 특히 이 집 아귀찜을 달고 끊적이지 않은 멋진 맛인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수 막걸리 밖에 없다는 점이다. 기찰 생탁주가 있다면 이 집 안주와 딱 떨어지는, 절친과도 같은 맛일 것이다. Ben E. King의 ‘Stand by Me’처럼 늘 내 곁에 두고 마시고 싶은.
참고자료 :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