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그리운, 대잎 품은 막걸리 15(사천, 대밭고을)

위스키 한잔

시가 한개피

그리고

제복 위의 수많은 훈장들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 포스터의 홍보 문구이다. 시각 장애인을 연기한 알 파치노가 낯선 여인과 아름다운 탱고를 추는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다. ‘여인의 향기’의 탱고 신을 보면서 생각했다. 탱고를 추는 알 파치노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각 장애인과 스스럼없이 탱고를 추는 낯선 여인의 여유로움이 참 멋지다고. 저 멋진 여인과 춤을 추는 알 파치노는 지금 무엇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건 무얼까라고. 아마도 낯선 여인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포스터의 홍보 카피의 첫 줄도 ‘위스키 한잔'과 '시가 한개피'였을 것이다. 강렬한 향기를 뽐내는 것들이니까.

세상은 예외 없이 향을 품고 있다. 낯선 땅에 섰을 때 풍겨오는 이국적인 향의 기억은 내 눈에 비친 기억보다 훨씬 선명하게 오래 기억된다. 모로코에서의 건조한 먼지 냄새, 발리의 습기 머금은 향신료 냄새 등 이 세상을 구성하는 무형의 강렬함은 향기이다. 음식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 맛의 달인 ‘숯불의 마력’ 편에서 주인공 지로는 말한다. ‘장어는 연기와 냄새로 장사를 한다는 옛말도 있어. 장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냄새를 맡으면 참지를 못하지.‘ 직화구이의 핵심을 꿰뚫는 대사다. 21세기에 숯불이든 연탄불이든 인간이 직화요리를 끊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직화만이 창조할 수 있는 뿌연 연기 속 강렬한 맛의 향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별이 빛나는 밤에 연탄불을 타고 오르던 꽁치의 찬란한 훈향을 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직화 향기 속에 흐르던 맛의 유혹을, 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난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왜’ 거부해야 하는가? 맛있는 향은 거부할 이유 없는 절대적 유혹이다.

뚜껑을 여니 향에서 알코올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온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향의 기세가 좋다. 대잎 품은 막걸리 15의 첫인상이다. 3번 빚고 90일을 기다린 15도 프리미엄 막걸리라고 한다. 맑은 윗술의 빛깔이 노르스름하니 참 곱다. 원주가 아닌 가수를 한 막걸리로 15도는 개인적으로 처음 마주한다. 기대된다. 15도 막걸리.

알코올 : 15도

재료명 : 정제수, 찹쌀, 맵쌀, 누룩, 댓잎

첫 잔

단맛과 쌉싸래한 술맛이 가볍게 넘어온다. 맑음에 초점을 둔 막걸리다. 단맛의 기세에 묻혀 15도의 높은 알코올 기운이 잔잔하게 혀를 넘어간다. 목젖을 지나 가슴에서 뜨끈히 열이 올라온다. 탄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질감의 술이다. 도수가 높은 만큼 찬찬히, 여유 있게 입술을 적시듯 마실 수 있는 녀석이다.

요즘 MZ세대를 중심으로 위스키가 인기라고 한다. ‘갈 때까지 가는 거야’라며 술떡이 되도록 마시고 싶지도 않고, 천천히 음미하듯이, 한잔을 마셔도 나만의 개성을 담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이 반영됐을 것이다. 술 시장 전체로 보면 위스키를 포함한 높은 도수의 술, 소위 말하는 ‘스피릿(알코올 도수 40도 이상의 증류주를 통칭 스피릿이라고 한다. 의미 없는 수분은 날리고 진정한 영혼만 담았다는 의미이다)’한 증류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박재범의 원소주로 촉발된 증류식 소주의 인기는 임창정 소주, 윤미래 소주 등 다양한 소주의 출시로 이어지고 있다. 진로와 새로로 재점화된 희석식 소주 도수 낮추기 경쟁(이제 선양에서 14.9도 소주도 출시됐다)과 더불어 한 잔을 마셔도 제대로 마시겠다는 트렌드를 반영한 고도수의 술도 소주와 막걸리를 중심으로 경쟁적으로 출시되고 있다. 대잎 품은 막걸리 15도 이런 최근의 경향을 반영한 막걸리라 할 수 있다. 흐름을 놓치지 않은 정확한 방향성이다. 근데, 이 녀석은 고도수 막걸리가 가져야만 하는 결정적 요소를 거세해 버렸다.

둘째 잔

매콤한 두부김치와 함께 페어링 하니 숨어있는 아주 약한 산미가 느껴져 훨씬 복합적인 맛을 낸다. 매콤한 안주와 함께하면 좋을 술이다. 물론 그 산미가 볶음김치의 산미인지 막걸리의 산미인지 불명확하지만, 단맛에 쌉싸름한 술맛이 더해진 다소 평면적 이미지가 두부김치와 더불어 다채로워짐은 확실하다. 그런데 둘째 잔까지 오니 의문이 생긴다. 이 녀석은 벌컥벌컥 마셔야 되는지, 음미하듯 마셔야 되는지. 찬찬히 즐기듯 음미하기에는  술잔에 담겨있지 않은 녀석이 하나 있다. 향이다.

단언컨대 MZ세대가 위스키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향기 때문일 것이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오크통 안에서 10여 년의 기다림 끝에 세상 밖으로 나온 황금빛 물결 속에는 짙은 스피릿의 향취가 배어있다. 스모키 한 달콤함이 40도 알코올의 강렬한 향과 혼합되어 마시기 전에 취하게 만든다. 잔에 코를 대고 심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스키를 즐길 수 있다. 위스키에 향이 없다고 상상해 보자. 오렌지 빛 조명 아래 다리를 꼬고 앉아, 얼음 한 조각 띄운 위스키를 부드럽게 돌려준 후 여유 있는 미소 한 조각을 더하며 황금빛 넘실대는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오뚝한 콧날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길게 호흡할 수 있겠는가? 향이 없는 위스키를 무슨 수로 온갖 분위기를 잡아대며 마실 수 있겠는가. 그냥 쓰디쓴 액체를 홀짝일 따름이다.

셋째 잔

향이 없다. 병뚜껑을 열었을 때 느껴졌던 기세 좋은 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저 점잖고 평면적인 녀석이 잔에 앉아 있다. 향이 없으니 밋밋하다. 이 녀석을 어떻게 마셔야 할지 혼란스럽다. 소주처럼 작은 잔으로 원샷을 때려야 하는지, 막걸리답게 사발잔으로 벌컥벌컥 들이켜야 하는지, 위스키나 와인처럼 잔에 코를 대고 음미하듯 마셔야 하는지 모르겠다. 음미하기에는 향이 없고, 벌컥벌컥 하기에는 도수가 높고, 소주잔에 마시기에는 어정쩡하다.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와인이 14~15도 사이의 도수를 가지고 있다. 15도의 도수를 가지고 있는 대잎 품은 막걸리 15는 어쩔 수 없이 와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 혹은 알코올을 잉태하고 있다. 와인은 향을 아로마(aroma)와 부케(bouqet)로 구분한다. 아로마는 포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향을, 부케는 발효-숙성 과정에서 화학적으로 자연 형성되는 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두 향과 맛을 통칭하여 풍미(flavor)라고 일컬으며, 와인의 맛을 과실향, 꽃향, 떫은맛, 우드(wood) 등으로 구분하여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그만큼 와인 한 병이 품고 있는 즐길 거리가 많은 것이다. 마시면 취하는 거 똑같은 술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마셔야 하냐라는 반문은 술을 즐기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한 잔을 마시더라도 풍요롭게, 스토리를 만들며 마시는 술이 훨씬 즐겁다.

대잎 품은 막걸리 15는 주조의 철학이 ‘맑음’에 있음으로 생각된다. 90일의 숙성 과정에 댓잎을 첨가하여, 잡미와 잡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맑은 맛의 막걸리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제품이지만, 짙게 느껴지는 아쉬움은 가성비에서 비롯될 것이다. 500ml 16,000 원의 가격은 750ml의 와인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절대 대중적인 가격은 아니다. 높은 도수와 가격에서 오는 큰 기대감에 비해서, 이 녀석이 품고 있는 다양함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승발이의 맛 평가 : 댓잎을 첨가하지 않고 숙성시킨 막걸리도 출시하면 어떨까. 누룩의 쿰쿰함이던, 시큼한 발효향이던 좀 더 센 캐릭터를 가진 막걸리였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래야 15도 막걸리의 힘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듯하다. 3.8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겉보기에 거칠지만 고소한 맛이 가득한 국산콩 수제두부(대기업 제품 말고)에 돼지고기 볶음 김치를 곁들이자. 막걸리 안주계의 바이블인 두부김치지만 대잎 품은 막걸리 15와 어울림은 특히 좋다. 고소하고, 기름지고, 시큼한 맛의 두부김치가 맑은 맛의 막걸리를 만나 입맛을 풍요롭게 해 준다. 관악기와 일렉 사운드가 풍성하게 버무려진 시카고의 고전 ‘Saturday in the Park’도 곁들이면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