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오서산, 소머리국밥과 홍주 생막걸리(홍성, 홍주주조)
홍성은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다. 국수로 유명한 대전도 아니고, 호두과자의 천안도 아니며, 신도시 세종도 아니라, 2013년부터 홍성이 충남의 도청 소재지다. 심하게는 지명을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소리 소문 없는 고장이 홍성이다. 아마도 산 좋고, 물 좋고, 회자될만한 큰 사건도 없는 평온한 곳이기에 조용히 10년 간 도청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홍성에도 물론 막걸리가 있다. 하나마나한 말인데 또 하고 있다. 홍성의 신도시인 내포면의 내포 막걸리도 제법 유명세가 있고, 홍성 군내에는 홍주 생막걸리가 쉽게 눈에 밟힌다. 개인적으로는 홍주 생막걸리가 내포 막걸리보다 술맛의 균형감과 깔끔함이 더 좋다. 홍주 생막걸리의 심플한 맛은 제법 괜찮다.
알코올 : 6도
원재료 : 정제수, 쌀, 올리고당, 누룩, 아스파탐
지역의 저가 막걸리에선 보기 드물게 딱 떨어지는 원재료다. 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고, 올리고당은 발효 촉진제로 아스파탐은 감미료로 첨가됐을 것이다. 마셔보자. 좋다. 농밀한 질감의 막걸리가 입 안을 살포시 적신다. 산미와 단맛의 조화가 제법이다. 은은한 요구르트 맛의 뒷맛도 괜찮다. 여기까지다. 산미도 단맛도 나쁘지 않은데 특별히 회자될만한 개성이 없다. 나름 쌀과 누룩으로 정성스럽게 빚은 막걸리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더 크다. 가지고 있는 본연의 캐릭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 녀석을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다. 믿고 따라와 보라. 홍성 생막걸리의 기가 막힌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서해의 등대라 불리는 산이 홍성에 있다. 서해안을 바라보고 있는 산 중 가장 높은 790m 높이의 산이다.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오서산이다. 멀리서 보면, 겨울산은 황량하다. 풍성했던 푸르름으로 무장했던 지난날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고, 앙상하고 헐벗은 나무들의 조합이 헛헛하게 산을 지킨다. 하얀 눈이 소복이 감싸기라도 해야 겨울산은 헐벗음을 잠시 잊지만, 햇살과 바람이 눈을 날려 버리면 이내 갈색의 외로움으로 돌아온다. 멀리서 보면, 겨울의 오서산도 그렇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사브작 사브작 발을 옮겨 오서산 품으로 들어간다. 아침 일찍 가야 한다. 점심 무렵 여유 있게 가도 충분하지만, 홍주 생막걸리를 최고로 즐기려면, 아침 일찍 올라야 한다. 이유가 다 있다. 곱지 않은 경사가 등골에 땀을 낸다. 한발 한발 옮기는 게 쉽지 않지만, 어쩌랴 산의 품에 안겼으니 오를 수밖에. 종아리가 땅겨 뻣뻣해질 무렵 오서산 능선에 닿는다. 시야가 시원해진다. 봉긋이 솟아있는 봉우리들과 갈색 들녘의 사이를 저수지들이 푸르게 채우며 덩실덩실 어우러져 있다. 땅끝의 선이 머무는 곳에 서해바다의 고요함이 살포시 파도치고 있다. 갯벌을 적시는 밀물에 묻어온 바람이 들녘 넘어, 봉우리를 지나,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롤 스쳐 오서산 능선에 닿는다. 겨울바람이 보드랍다. 오서산은 가을산으로 유명하다. 능선의 억새풀이 밭을 이루고 있다. 억새꽃이 화려하게 흔들리는 가을의 오서산은 사람들도 밭을 이룬다. 겨울 오서산의 능선길에는 억새가 누워 폭신한 누런 융단길이 깔린다. 바다와 봉우리와 들녘을 시야 가득히 품고, 억새 누운 능선길을 고실고실하게 걸어간다. 보드라운 서해바다의 바람결이 산꾼의 곁을 따라다닌다. 평온하다. 정상을 지나 20여 분간 산들산들 걷는 능선길이 너무나 평온하다. 하산길에 접어들여 숲길로 들어선다. 앙상한 나무들이 내어준 낙엽들이 산산이 산길에 뿌려져 있다. 갈색 뼈대를 앙상히 드러낸 나무들이 오밀조밀하게 산길을 따라, 계곡을 따라 비탈을 누비며 뻗어있다. 갈색의 고요함을 비집고 햇살이 내려온다. 포근하다. 겨울 오서산의 발가벗은 속살이 포근히 안아준다. 겨울산의 반전이다. 멀리서 보면, 차가운 황량함으로 보이던 산이지만 다가가면, 품 안으로 들어서면 평온한 포근함으로 산객을 안아준다. 악산은 아버지가 거친 턱수염으로 볼때기를 문대시던 짓궂은 넉넉함으로, 육산은 어머니가 이불 사이에 끼어 넣어둔 공깃밥의 따스함으로 산객을 품어준다. 오서산의 품을 벗어나니 허기가 돋는다. 서두르자. 홍주 생막걸리 최고의 맛집이 영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홍성 전통시장으로 향한다. 오후 2시까지만 영업하는 집이다.
홍흥집. 소머리국밥 집이다. 홍성에서 흥하라는 의미에서 명명한 상호라고 한다. 재료 준비 때문에 일주일에 2~3일을 수시로 영업하지 않는다. 재료가 떨어지면 바로 영업 종료다. 그러니 가기 전에 전화를 해보던, 아닌 영업 개시시간인 11시에 맞춰서 가야 한다. 오서산을 아침 일찍 가야 한다는 이유는 오로지 홍흥집 때문이다. 늦게 하산하면 홍흥집 소머리국밥을 먹을 수 없다. 홍주 생막걸리 최고의 맛을 즐길 수 없다.
기껏해야 소머리국밥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폄하할 수도 있다. 어이가 없다. 일단 먹어보시고 판단하라. 맑고 깊은 맛을 내는 소머리국밥이 세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다. 내 경험상 두 곳뿐이다. 포항의 장기식당, 그리고 홍성의 홍흥집이다. 막걸리는 당연히 홍주 생막걸리. 양은 쟁반에 밑반찬과 함께 담겨온 막걸리를 잘 흔들어 한잔 따른다. 주욱 들이킨다. 제법 세지만 거슬리지 않는 탄산이 목젖을 친다. 은은한 단맛이 깔끔하게 입을 적신다. 오서산처럼 술맛이 보드랍다. 반찬으로 나온 깎도가 한 점을 더한다. 아주 좋다. 매콤 시큼한 깍두기가 보드라운 단맛과 어우러져 멋지게 혀를 유혹한다. 산에서 땀 빼고 와서 뭔 막걸리든 맛이 없겠냐고 하면, 할 말 없다. 바로 수육 한 접시 나오니 머리 고기 한 점에 막걸리 한 사발 한 후에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산에도 다녀왔고, 홍흥집에 자리도 잡았으니 시간 많지 않은가.
소머리 수육이 나왔다. 볼살과 이그니, 우설이 가지런하게 접시에 담겨온다. 먼저 우설 한 점. 우설은 누가 뭐래도 물에 삶은 것이 가장 맛있다. 부드럽고 고소한 육즙이 슬며시 단맛까지 품고 있다. 드디어 홍주 생막걸리의 진가가 발휘된다. 질 좋고 신선한 우설의 고소한 육즙을 막걸리가 세련되게 받아준다. 누룩으로 발효시켰지만 누룩 특유의 쿰쿰함이 홍주 생막걸리에는 없다. 깔끔하고 세련된 맛의 막걸리가 최상급 우설 수육과 만나니 금상첨화요, 지화자 어기영차다. 깍두기 한 점으로 입을 정돈하고, 이번엔 이그니(껍질 부위) 한 점. 쫄깃한 식감이 치아를 자극한다. 우물우물 씹을수록 지방의 단맛이 더해진다. 역시나 막걸리 한 잔. 쫄깃하게 농축된 지방의 단맛이 더해지니 술맛에 숨어있던 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늘종을 고추장에 찍어서 매콤하게 막걸리 한 잔을 더하고, 부드러운 볼살 한 점 한다. 맛있다. 홍흥집 소머리 수육은 깔끔하다. 홍주 생막걸리의 세련되고 은은한 단맛과 궁합이 아주 좋다. 특히 이 집의 깍두기는 소머리 고기의 기름짐을 잡아주는 일등 첨병이다. 깍두기와 소머리 수육의 완벽한 조화가 홍주 생막걸리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내주고 있다.
국밥이 나왔다. 홍흥집의 소머리국밥은 맑다. 그리고 진하다. 뽀얀 국물빛이 아니다. 오리지널 나주곰탕의 국물을 생각하면 된다. 감칠맛 가득한 맑고 진한 국물 안에 소머리 고기가 부드럽고 쫄깃하게 담겨있다. 명품 국밥집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다대기(다진 양념)다. 명품 국밥집들은 한결같이 다대기도 맛있다. 선명하고 감칠맛 있는 매운맛이다. 단맛이 없다. 수육에 다대기 살짝 얹어서 먹어도 좋다. 홍흥집 소머리 국밥에 다대기를 넣어서 매콤하게 먹어도, 맑은 국물 그대로 먹어도, 다 좋다. 어떠한 경우라도 진하고 구수한 감칠맛을 깔끔하게 즐길 수 있다. 허겁지겁. 한 뚝배기 뚝딱하고 막걸리 막잔을 털어 넣는다. 입 안 가득하던 국밥의 진한 향기가 산뜻하게 막걸리에 씻겨 사라진다. 깔끔하게 주조한 홍주 생막걸리 덕분이다.
홍성의 맛은 곱다. 홍흥집 소머리국밥의 맑고 진한 맛도 곱고, 쌀과 누룩으로 빚은 홍주 생막걸리의 맛도 곱다. 보드라운 겨울 오서산의 포근한 품이 국밥에도, 수육에도, 막걸리에도 녹아있다. 등산 후라면 거친 탄산의 막걸리도, 달디 달은 막걸리도, 온갖 착향료로 기교를 핀 막걸리도 다 맛있겠지만 포근하지는 않다. 투명하고 깊이 있는 홍흥집의 맛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어우러지지도 않는다. 홍주 생막걸리는 어우러진다. 이 녀석의 캐릭터가 그렇다. 오서산과 어우러지고, 홍흥집의 소머리 고기와 어우러질 때 도드라진다. 그래서 홍성의 막걸리이다.
승발이의 맛 평가 : 홍성에서 세련되고 친화력 좋은 조용한 미인을 만났다. 4.2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솔직히 이번 편은 홍흥집을 위해 쓰인 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주인장의 친절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까지 더해지니, 이 집의 맛은 위력적이다. 꼭 한번 먹어볼 맛이다. 홍흥집 소머리 고기가 없다고 홍주 생막걸리의 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깍두기다. 섞박지 스타일의 크고 단맛을 강조한 깍두기 말고,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야무진 맛의 새콤한 깍두기가. 홍주 생막걸리와는 딱이다. 정훈희의 ‘안개’ 오리지널 버전과 함께 해보자. 자칫 평면적일 수 있는 맛이 보다 깊고 다채로워지리라. 참고로 정훈희의 ‘안개’는 오서산 산행에 동반해준 고마운 독자님의 신청곡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