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남도의 맛 첫번째, 덕자와 수덕산 생막걸리
여름 남도의 맛으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막걸리는 전라도 고흥의 막걸리입니다. 제게는 이 막걸리와의 만남이 생생한데요. 몇 년 전 [허영만의 백반기행] 촬영 차 고흥 백반의 숨은 고수 ‘다미식당’을 방문했습니다. 맛난 백반 한 상 푸짐하게 영접하고 식당을 나서는데 길 건너 조그만 구멍가게가 보이 길래 들어가 고흥 막걸리 한 통 구입했습니다. 그러고는 별생각 없이 마셨는데.. 에구머니나! 첫인상이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기억이 또렷한 걸 보니, 이 녀석 제법인 막걸리인 거죠.
‘수덕산 생막걸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고흥 합동주조장에서 만들고 있는 수덕산 생막걸리를 저는 남도 막걸리 베스트 중 하나로 손꼽는데요.
어느 막걸리 모임에서 이 막걸리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재미 삼아서요. 사실은 모임 멤버들이 전통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분들이었거든요. 나름 한국술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 수덕산 생막걸리를 마신 후 반응이 어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맑고, 잡미가 없다
장수 막걸리 고급 버전 같다
집에 여러 병 두고 편하게 마시고 싶다
아스파탐이나 감미료가 안 들어간 거 같다
금정산성과 송명섭 막걸리를 섞어 놓은 거 같다"
꽤 괜찮은 소감들이죠.
정리해 보면 “달지 않고, 깔끔한 산미로 맑게 마실 수 있는 좋은 막걸리다”라고 볼 수 있겠죠.
호평들이 이어질 때 가격과 주성분을 공개했는데요, 이때 또 한 번 놀라는 반응이 터졌습니다. 수덕산 생막걸리는 팽화미로 만든 1,200원짜리 저가형 막걸리거든요. 물론 아스파탐도 들어갔습니다.
막걸리 공부 좀 했다는 분들은 팽화미 거나, 입국을 쓰면 전통에서 어긋났다는 선입견을 갖고 멀리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팽화미는 일종의 뻥튀기이거든요. 쌀을 뻥튀기해서 익혀놓아 쌀을 씻고, 찌고, 식히는 땀나고 피곤한 작업을 축약시켜 놓은 편의성 가득한 주조용 쌀입니다. 입국은 일본식 개량 누룩인 ‘코지’의 다른 표현이고요. 그러니 막걸리 전문 애호가들이 멀리할 이유가 충분히 있죠. 하지만 고흥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맛이 없는 막걸리를 굳이 선택할 이유는 없죠. 특히나 여름에는 병어, 가을에는 삼치 등 진한 맛의 해산물부터 황가오리처럼 맑고 섬세한 맛을 지닌 해산물까지 다양한 어종을 일상에서 접하는 고흥 사람들이 선택한 막걸리라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수덕산 생막걸리’는 팽화미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막걸리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가 된 술입니다. 이 맑은 막걸리와 어울리는 여름 남도의 안주는 무엇이 좋을까요?
제가 추천하고 싶은 안주는 여름 남도바다의 진미 ‘덕자’입니다. 예전 동네 누나 이름 같기도 한 덕자가 낯선 분들도 꽤 있을 텐데요. 덕자는 빵이 좋은 병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명태 새끼를 노가리라고 하듯이, 병어보다 덩치가 크고 두터운, 빵이 좋은 녀석들을 남도 사람들은 덕자라고 부르죠. 그렇다고 명태-노가리 관계처럼 어미-새끼의 관계는 아닙니다. 크기에 따른 명칭 분류인 샘이죠. 사촌으로 덕대도 있습니다. 병어 사촌인 생선인데. 생김새도 매우 흡사해서 덕자와 혼돈되기도 하죠. 꼬리지느러미가 일자면 덕자, 꼬리지느러미의 상하 길이가 다르면 덕대입니다.
덕자는 일단 맛이 좋습니다. 비린맛 하나 없이 깔끔한 고소함이 일품입니다. 병어는 뼈째 썰어 뼈째회로 먹지만 덕자는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포를 떠서 회로 먹을 수가 있죠. 특히나 뱃살의 고소함은 천하 일미입니다. 15년 전쯤에 민어 촬영차 신안 임자도에서 민어배를 탔을 때 먹어본 덕자회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민어보다 한 수 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덕자 구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돈이 있어도 도시에서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남도 사람들이 잡히는 족족 현지에서 소진하는 까닭에 도시 촌놈들에게는 맛볼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쉬운 데로 덕자보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진 병어로 서운함을 달랠 밖에요. 물론 병어도 남도의 여름 맛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솜씨 좋은 조리장을 만나신다면 특별히 부탁해 보세요. 병어 세꼬시를 칠 때 뱃살은 따로 썰어 달라고요. 손톱 크기 만한 병어 뱃살이 가마니 크기 만한 만족감을 줄 테니까요. 신선하다면 병어 코도 달라고 하시고요. 남도에서는 병어 코도 회로 먹는 답니다. 뼈째 씹어먹는 행위 자체가 그로데스크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맛이라고 하네요. 뼈가 연해서 잘 씹히기도 하고요.
덕자나 병어회를 먹을 때 꼭 권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빨간 초고추장 말고 ‘초된장’에 꼭 한 번 찍어 먹어 보시기를요. 초된장 만들기도 쉽습니다. 막걸리 식초와 된장을 잘 버무리면 됩니다.
남도지역, 진도에서 남해까지 남도의 유명한 회무침 집 주방 창가에는 예외 없이 막걸리 식초통이 놓여 있습니다. 민어회로 유명한 목포의 영란식당, 서대회 무침으로 전국구의 지위를 얻은 여수의 동서식당, 멸치회무침의 남해 지존 우리 식당 등 전통의 노포들은 모두 막걸리 식초를 주방 창가에 두고 있죠. 기분 좋은 새콤함과 청량함 속에 은은한 단맛을 품고 있는 막걸리 식초는 아주 훌륭한 조미료이죠. 신당동에 유명한 홍어회집이 있었는데, 그곳의 주인 할머니는 막걸리 식초통 입을 솔잎뭉치로 막아놓았던 기억이 있네요. 대 여섯 개의 큰 막걸리 식초통 입에 꽂혀있던 솔잎뭉치가 참 특이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이유를 못 여쭤본 게 한스럽기만 합니다.
막걸리 식초로 조미한 초된장에 병어회를 찍어 먹어도, 상추쌈에 올려 먹어도 너무 좋은데요. 부드러운 짠맛은 회맛을 살려주는데 초고추장 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과거에 일본식 사시미에는 소금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죠. 막걸리 식초로 버무린 초된장은 뒤에 남는 은은한 단맛도 일품입니다.
여름 남도의 맛, 수덕산 생막걸리와 덕자회(혹은 병어회도 굿)!
‘회에는 소주지’하고 처음엔 이 조합을 반신반의할 수 있겠지만, 초된장에 찍어 먹는 회 한 점에 수덕산 생막걸리 한 잔 마시다 보면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맛’으로 번져나갈 듯합니다. 덕자나 병어회를 녹진한 고도수의 비싼 막걸리와 먹었다면 아마 이 감흥을 없었을 겁니다. 입안이 너무 과해지거든요. ‘회에는 소주지’라는 생각을 팽화미로 담근 소덕산 생막걸리가 바꿔줄 거라고 전 믿습니다. 남도의 여름 덕자와 병어회와는 그만큼 자신 있는 궁합이니까요.
귀한 분과 일상의 대화를 편하게 나누고 싶을 때,
여름 남도의 진한 맛과 솔바람 그늘에서 부는 청량한 바람이 그리울 때,
덕자 혹은 병어회와 수덕산 생막걸리는 두고두고 당신이 추억할 맛일 겁니다.
TIP
아.. 이 맛을 위해 고흥을 가야 하냐고요?
그럼 베스트죠. 너무 멀다고요? 그럼 수덕산 생막걸리는 택배로 받으셔서 좋은 사람들과 나눠드세요. 600ml 20통에 28,000원이랍니다. 택배비 포함이고요.
덕자회를 서울에서 드시고 싶다면 종로 6가 초당을 추천합니다. 솔직히 감춰두고 싶은 보석 같은 남도 맛집인데 특별히 알려드립니다. 민어회도 좋고 덕자회도 종종 준비를 해두는 숨은 맛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