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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맛과 술 3 - 어복쟁반과 향음표준

조승연 PD
조승연 PD
- 15분 걸림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은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북녘의 대표 시인 백석(1912~1996)이 노래한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시의 제목인 ‘국수’입니다. 겨울에 먹는 국수 즉 냉면이죠. 이북 사람들은 정말로 냉면을 좋아했나 봅니다. 이렇게 멋진 시까지 남겼으니까요. 백석 시인의 ‘국수’에는 냉면 레시피뿐 아니라 북쪽 음식의 특징을 정확히 대표하는 두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슴슴한’과 ‘쩡하다’입니다. 과장 한 수저 보태면 이 두 단어로 북한의 모든 맛은 표현이 가능할 정도죠. 어복쟁반처럼 말입니다.

어복쟁반

1980년대 서울 변두리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동네에 족발집이 새로 생겼었죠. 당시만 해도 족발집이 그리 흔한 음식점도 아니었고, 배달음식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절은 더더군다나 아니었습니다. 장충동 족발촌을 벗어나 막 대중화가 되려던 시점이었죠. 근데 족발집 메뉴 중에 눈에 띄는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어복쟁반'이었습니다. '어복쟁반? 저게 뭐지? 복 있는 물고기를 쟁반에 내놓는 건가? 복어 음식인가?'. 짱구를 요리조리 돌리다 아버지에게 여쭤봤죠. "저거 이북음식이라고 실향민들은 좋아라 하던데 난 영 심심해서 별로더라. 신선로 비슷한 게 값만 비싸고". 맛도 별로라고 하고, 값도 만만치는 않으니 어복쟁반은 그저 이름만 신기한 음식이었죠. 아마도 동네 족발집 주인장은 북한 출신이셨을 수도 있습니다. 족발이 실향민들이 만든 음식이기도 하니까요. 약 20여 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어복쟁반을 맛볼 수 있었죠. 무교동 남포면옥에서요. 아, 이 맛을 모르고 산 세월이 야속하고, 맛이 별로라고 했던 아버지가 밉더군요. 슴슴하고 구수한 육수에 소고기 양지살과 다른 곳에서 맛보기 힘든 유통(소의 유방)이 담긴 너른 쟁반은 맛의 평원이었습니다. 맑고 깊고 구수하고 고소한 국물 안주의 종합체라고나 할까요. 촉촉한 양지살을 씹다가 국물 한 수저 뜨고 소주 한잔, 고소함의 끝판왕인 유통에 또 소주 한잔, 담백한 이북식 만두 사리 추가해서 또또 소주 한잔. 허허허, 너무 맛있어서 헛웃음이 나더군요.

어복쟁반의 어원은 여러 설이 있습니다. 물고기의 내장을 넣고 끓인 음식이어서 어복이라 불리다 소의 내장까지 넣게 되어 어복장국이 되었다고 1926년 동아일보에 평양 풍속을 연재했던 유지영(1896~1947) 기자는 썼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보다는 소의 특정 부위를 지칭한 데서 ‘어복쟁반’의 어원을 찾는 게 더 근거 있어 보입니다. 암소의 배받이 고기를 일컫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어북살'이죠. 암소의 배 부위 겉양지살을 예전에는 어북살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좀 더 정확히는 업진살 부위를 일컫는다고 하죠. 혹자는 치마양지, 즉 치맛살 부위를 지칭한다고도 하는데 어쨌건 '어북살'이 소의 겉양지살, 즉 배받이 부위를 말하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북살'로 전골 요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나중에 '어복쟁반'이 되었다고 하는데 가장 그럴듯해 보이네요. 예전 이북에서 어복쟁반은 해장국이자 술안주였다고 합니다. 아침에 술 깨려고 여럿이 모여 어복쟁반의 국물로 속을 달래면 해장국이요, 저녁에 또 모여서 소 배받이살을 뜨근한 국물에 덥혀 먹으면 안주가 되는 거지요. 해장과 술의 무한 반복의 핵심에 어복쟁반이 있었던 겁니다. 유지영 기자의 1926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값은 쟁반 하나에 일 원씩인데 네 사람이 충분히 먹을 수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당시 경성 시내 4인 택시비가 일 원이였다고 하니 나름 착한 가격이었네요. 택시 안 타면 네명이 함께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예전에, 지금은 아닙니다. 세월은 늘 변하니까요. 무교동 남포면옥 구관(신관은 이상하게 느낌이 헛헛하네요)에 들어가면 주방 앞에 놋쟁반에 수북이 쌓여 있죠. 물론 죄다 어복쟁반입니다. 좌에서 우로 혹은 우에서 좌로 어째 거나 뱅글뱅글, 양지살, 유통 전, 쑥갓, 버섯, 대파, 만두 등이 나란히 쟁반 안에 줄 서 있습니다. 쟁반 위에 자리 잡은 고명들 위로 냉면용으로 뽑아놓은 고기 육수를 찰랑찰랑 채워 놓습니다. 보골보골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양지살 한 점, 유통 한점, 야채 한 점을 소주를 벗 삼아 먹습니다. 아, 깜빡했네요. 쟁반 한가운데 따끈하게 데워진 간장 종지를 지나치면 안 되죠. 아주 오래전 남포면옥의 어복쟁반 가운데에는 자그마한 놋종지가 놓여 있었답니다. 조선간장과 파 마늘로 맛을 더한 양념간장이었죠. 중탕이 되듯이 따끈하게 데워진 양념간장에 배받이살 한 점 찍어서 우물우물 씹어 봅니다. 조선간장의 선명한 짠 기운을 뚫고 은은한 단맛이 배어 나오네요. 육수에 데쳐진 야채도 양념간장에 찍어 먹습니다. 질 좋은 채소의 단맛이란 이런 거군요. 조선간장의 솔직한 짠맛 덕분에 수줍던 채소의 단맛이 기지개를 켜네요.

어복쟁반의 히든카드. 조선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장

어복쟁반의 전체적인 맛은 슴슴합니다. 심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극적이지 않고, 특정한 맛이 도드라지지 않은 맛이죠. 화려한 미녀의 섹시한 웃음보다 수줍은 아가씨의 살포시 한 미소가 심상에 더 큰 파동을 일으키 듯이 슴슴한 맛 속에는 수줍은 아가씨의 미소 같은 맛이 숨어있죠. 고기의 단맛, 채소의 단맛이 바로 그것입니다. 워낙 수줍게 숨어있는 맛이기에, 화려한 꾸밈 속에서는 느낄 수 없고 급한 폭식에선 지나쳐 버리고 마는 맛입니다. 따끈히 데워진 조선간장이 낯가림 많고 수줍은 단맛을 가장 잘 이끌어 준답니다. 양조간장은 데우면 쓴 맛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고, 들쩍한 단맛이 오히려 재료의 맛을 가리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조선간장은 다르죠. 선명한 짠맛이 재료 고유의 맛을 살려줍니다. 무뚝뚝하지만 듬직하고 순박한 웃음을 짓는 건장한 청년처럼 말이죠. 당장은 큰 인상을 남기지 않지만, 뒤돌아 서면 자꾸만 떠오르는 맛이 바로 슴슴한 맛입니다. 숨어있던 진미를 일깨우는 힘이 슴슴함에는 있죠.

어복쟁반에는 확실히 소주가 어울립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죠. 대기업의 희석식 소주 말고 전통주 주조장에서 뽑아낸 증류식 소주를 곁들여 보세요. 슴슴한 어복쟁반에 담백하고 구수한 증류식 소주의 궁합은 참 좋습니다. 증류식 소주도 증류 방식에 따라 상압식과 감압식으로 구분이 되죠. 상압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방식, 소줏고리에 발효주를 넣고 불을 때서 소주를 내리던 방식을 생각하면 되고요, 감압식은 증류기 내부의 압력을 높여 정상 발열점보다 낮은 온도에서 소주를 내리는 방식입니다. 어렵죠? 옛날 방식은 상압식이고 대기업이 선호하는 과학기술이 더해진 방식은 감압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화요나 원소주가 감압식으로 증류한 소주죠. 맛이 깔끔해요. 하지만 정이 좀 부족하다고나 할까요. 상압식 소주는 쌀이나 보리가 탄듯한 구수한 풍미가 특징이죠. 거칠지만 정이 뚝뚝 떨어지는 아저씨를 닮은 맛이라고 하면 혹시 이해가 될까요. 기왕 소주와 어복쟁반을 먹는다면 상압 증류식 소주를 추천합니다. 그럼 막걸리는 뭐가 좋냐고요? 하.. 어렵네요. 단맛이 강한 막걸리는 어복쟁반의 수줍은 단맛을 더 꽁꽁 숨어버리게 만들기 십상이거든요. 그래서 한참을 고민했답니다. 어떤 막걸리가 있을까...?

대구시 군위 톨게이트 근처 국도변에 작은 조립식 집이 한 채 있습니다. 가정집 같기도 하고 농막 같기도 한 자그마한 집이 나린 증류소라는 양조장입니다. 부근 논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에 사라진 재래종 볍씨를 구해 탁주용으로 재배를 하고 있는 양조장이죠. 나린증류소에서 재래종 쌀로 빚은 막걸리가 향음표준입니다. 이 막걸리가 생각이 나더군요. 참 솔직하고 겉 멋없는 막걸리거든요. 단맛이 아예 없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복쟁반과 나란히 하기에 좋습니다. 직선적인 산미가 가득한 향음표준은 슴슴함 속에 숨은 단맛을 해치지 않습니다. 어복쟁반이나 향음표준 막걸리나 모두 꾸밈이 없거든요. 특히나 향음표준의 깔끔한 산미와 12도의 높은 도수는 입맛을 돋우는 효과도 있답니다. 육수에 촉촉이 젖은 배받이살에 시큼한 막걸리 한 잔을 천천히 들이켜 보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 침이 고이네요. 또 먹고 싶네요. 한 점 더, 한 잔 더, 이런! 어느새 국물만 남았네요. 잠시만요. 아직 끝이 아니랍니다. "뇜 싸래요~!!"

'뇜 싸래요'는 평양 사투리입니다. '사리 하나 더 주쇼'라는 뜻이라죠. 그렇습니다. 어복쟁반의 건더기가 사라지고 국물만 찰랑 거리기 시작하면 외쳐야 합니다. "뇜 싸래요~"라고 말입니다. 남은 육수에 메밀 사리를 넣어 따뜻하게 먹는 온면은 어복쟁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고기와 채소의 맛 성분이 녹아있는 육수에 따끈하게 데워진 메밀면을 한 입 가득 밀어 넣으면 구수함이 대폭발을 하죠. 이때 시큼한 향음표준 막걸리 한 사발을 더해보세요. 개운하게 입맛이 다시 돌아온답니다. 잊지 마세요. 조금은 천박해 보이더라도 어복쟁반의 메밀면은 허겁지겁 먹어야 된답니다. 메밀면은 뜨거운 육수에 쉽게 풀어져 금방 죽이 돼버리거든요. 면이 따끈하게 데워지면 후루룩 흡입하고, 시큼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또 외쳐야 합니다. "뇜 싸래요~"

추가 면사리는 필수

충분히 먹고 마셨으면 북한식으로 맛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죠. '쩡하게' 말입니다. 어릴 적 겨울방학 때 외가댁을 가면 평양이 고향이신 외할머니께서 손주에게 한 상 정성껏 차려주셨죠. 그리고 밥상의 마무리는 늘 뒷 뜰에 묻혀있던 항아리에서 가져다주셨습니다. "허허, 동치미가 아주 쩡하니 잘 익었다. 우리 손주 쩡하게 한 사발 들이키려무나". 기름진 반찬 가득한 밥상을 점령한 후에 마시는 얼음 동동 동치미는 환상적인 마무리였습니다. 가슴을 뻥하고 뚫어버리는 시원한 짠물 속에 아주 은은한 단맛과 매운맛이 녹아 있었습니다. 얇게 썰은 동치미 무 한 조각을 아삭하고 베어 물면 무의 맵싸한 단맛이 청량감에 실려 옵니다. 생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외할머니의 겨울 동치미의 맛. 그 맛이 바로 '쩡한' 맛입니다. 혹자는 '쩡한' 맛은 추억 속의 맛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하죠. 절대 아닙니다. 동치미뿐 아니라 북한식 김치는 남한의 김치에 비해 국물이 많습니다. 일반 김장김치도 따로 육수를 해서 부을 정도이니까요. 김치국물이 차디찬 겨울바람에 발효가 되고, 살얼음이 살짝 끼기 시작하면 '쩡한' 맛에 다가서게 됩니다. 선결 조건이 하나 있죠. 너무 달지 않아야 합니다. 충실한 재료의 맛 속에 숨은 단맛이면 충분합니다. 짠 김치국물이 삼투압 효과로 배추와 무에 있는 단맛 성분을 꺼내 국물에 녹여 놓은 단맛이면 족합니다. 그래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쩡하게' 뚫어 놓는 시원함이 완결되지요. 말은 쉬운데 이 맛을 현실에서 찾아내기가 솔직히 어렵긴 합니다. 망원동의 돼지갈비 노포인 청기와 숯불갈비의 물김치와 이제는 전설의 반열에 오르려는 고성 백촌 막국수의 동치미, 우래옥의 냉면김치가 그나마 '쩡한' 맛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나 할까요.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시인의 '국수' 마지막 구절입니다. 시인에게 국수 맛은 마을 사람들과 살갑게 친한 맛이었고, 고담하고 소박한 맛이었나 봅니다. 혹시 고담(枯淡)의 뜻을 아시나요? 청렴 결백하여 욕심이 없다는 뜻이네요. 그래서 인가요. 슴슴하고 쩡한 음식은 뒷맛이 참 맑네요. 은은하게 중독이 되네요. 또 먹고 싶네요. 이런, 욕심이 없다고 한 백석 시인의 말은 거짓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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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PD

맛&막걸리 콘텐츠 PD. TV조선에서 제작부장으로 [살림9단의 만물상], [애정통일 남남북녀], [모란봉 클럽], [시골빵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제작.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CP(책임 피디)로 전국의 맛난 음식 & 막걸리와 사랑에 빠져버림. 현재는 맛과 막걸리와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프로듀서로 열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