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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밀과 보리'에서 다랭이팜 생막걸리를(남해, 다랭이팜)

승발이-백반기행 피디
- 14분 걸림 -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전화 연결음이 울린다.

“형님 오랜만에 한 잔 하셔야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영국에서 건축사무소를 다니다 더 이상 외노자로 사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빌어 먹어도 한국이 좋다며 들어온 후배가 세상 고마운 연락을 했다. 광화문에서 악전고투 중이던 건물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라며 여유가 생겼단다. 영국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였다가, 한국에서는 건축주들의 슈퍼 을이 되었다며, 지구상의 약자가 아픔을 해소하기 가장 편한 방법을 공유하잔다. 편한 방법에는 자본이 소요되는 법이라고 점잖게 일렀더니 입금 됐다며 걱정 마시란다. 고마운 놈.

후배의 살뜰한 마음을 헤아려서라도 맛난 집을 가야겠다고 의지를 다잡는다. 소고기? 위스키? 오마카세? 베풀겠다는 녀석의 열정을 충분히 불지를 수 있는 후보지가 리스트 업되는 찰나의 순간, 핸드폰 너머 한 마디가 건네온다. “형님 오버하지 마시고 편한 데 가시죠”. 날 너무 잘 아는 놈.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가서 대충 걸치면 서운한 법. 둘이서 오붓이 한 잔 하기 괜찮은 곳을 떠올려 본다. 기왕이면 내가 마셔보지 못한 막걸리가 있는 집이면 더 좋고, 안주가 맛있으면 더더욱 좋다. 떠올랐다. 멀디 먼 강진의 드라이한 막걸리 설성만월이 있는 곳이다. 원재료의 특성을 너무도 잘 살린 감자전, 미나리 전, 홍어전이 있는 그곳. 북촌의 '밀과 보리'다. 편하다 못해 살짝 비좁고, 먹다 보면 계산서 금액이 제법 차오르는 술집이자 밥집이다.

“약도 보내줄게 5시 반에 보자"

“그렇게 일찍요?”

“일찍 안 가면 자리 없어. 웬만하면 예약하자”

박재동 화백의 그림에 허영만 화백이 답화로 완성한 밀과 보리의 벽화

원래부터 소문난 곳이었는데 방송 이후 늘어난 손님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맛이 여전하다는 반증이다. 기쁜 마음으로 좁은 골목 같은 식당 입구를 지난다. 내가 존경하는 두 분이 입구 벽에서 떡하니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허영만 선생님의 순발력 가득한 해학은 실로 압권이다. 좁은 골목 같은 식당 진입로를 걷는 몇 걸음은 맛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린다. 밀림을 뚫고 가야 보물을 찾을 수 있듯이, 진입로 끝에는 맛의 광장이 펼쳐지리라는 환상이 그 길에서 증폭된다.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술’리적이다.

“형님! 여기요” 일찍 온 후배에게 안주 선택권을 건넨다. ‘밀과 보리’는 미나리전과 홍어전이 아주 좋다고 강하게 설명을 해준다. 새우살을 갈아 넣은 미나리 전은 향과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아주 기가 막히다고, 홍어 전은 적어도 서울 바닥에서 가장 깔끔하고 가장 화끈한 맛을 감추고 있다고. 먹다가 입천장이 홀라당 까져버리는 홍어의 힘을 맛볼 수 있다고. 굳이 내가 먹고 싶어서 길게 설명하는 건 아니라고, 감자전도 괜찮다고 살며시 안주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감자전으로 할게요".  눈치 없는 강단 있는 놈.

감자전도 훌륭한 선택지다. 손목이 으깨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하며 강판에 일일이 갈아 만든 ‘밀과 보리’의 감자전은 도톰한 두께만큼 씹는 식감도 일품인 명품 안주다.

“술은 설성만월로 하자. 마시기 힘든 막걸린데 여기에 있어. 설성만월 한 통 주세요”

“죄송해요. 지금 설성만월이 떨어졌네요”. 모든 인연이 있다. 쉽게 맺어질 연이 아니었으리라 되새기며 스스로 위로하려 하지만, 슬퍼지는 표정마저 숨길 수는 없다.

“형, 그렇게 심각할 거까진 없잖아요. 그냥 장수 막걸리 마셔요 “

”넌 맥켈란 30년 스페셜 에디션이 있다고, 2시간 넘게 전철 타고 런던에서 브라이튼에 있는 바까지 찾아갔는데 맥켈란 30년 다 팔렸다고 하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짐 빔 마실 수 있겠니? “ 웃음 많은 후배가 깔깔되며 이해는 가지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다며 그럼 딴 막걸리라도 시키라고 재촉한다. 주문을 받던 젊은 총각이 설성만월처럼 드라이한 다른 막걸리가 있다고 가져다준다. 다랭이팜 생막걸리다.

보물섬 남해에서 온 막걸리

다랭이팜 생막걸리(남해, 다랭이팜)

알코올 : 11도

원재료 : 유기농9분도쌀, 찹쌀, 정제수

후배가 마셔본 막걸리냐고 물어본다. 처음 보는 막걸리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다분하다. 유기농9분도 쌀은 정미를 많이 해서 많은 쌀이 들어간다는 의미이고, 첨가제 없이 11도의 높은 도수를 뽑아냈다. 남해 바다의 풍경이 층층이 펼쳐지는 남해 다랭이 마을에서 올라온 점도 흥미롭다. 근데 원재료 표기에 누룩이든 입국이든 발효제를 누락시킨 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분명한 실수이다.

“오랜만이다, 현민아.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켜보자”. 벌컥벌컥

시큼함을 기본으로 여린 단맛을 배후에 깔고 있다. 비교적 맑고 쌉싸름하게 마실 수 있다. 다랭이팜 생막걸리는  새콤함이 아니라 시큼함이다. 때 맞춰 두툼한 감자전이 나온다. 여전하다. ‘밀과 보리’가 아니면 이만큼 풍만한 감자전을 만나기가 힘들다. 한 점 떼어 입에 넣는다. 뜨거운 김 가득 품은 거친 감자이 질감이 입 안을 자극한다. 강판에 간 감자만의 순수한 찰기와 식감이 딱 좋다. 밀가루를 섞으면 찰기도 넘치고, 단맛도 보강되지만 감자의 편안한 단맛을 즐기긴 어렵다. 깨끗한 기름에 부쳐서인지 뒷맛도 깔끔하다.

“어때? 맛있지”

“네. 좋은데요. 입자가 거칠어서 오히려 폭신하게 씹히는 맛도 있고, 담백하고 고소하네요. 맛있어요”

“막걸리는?”

“형님은 어때요? 저는 좀 심심해요”

한 잔 더 마셔본다. 연한 요구르트 맛이 스친다. 단맛이 첫 잔보다 짙어졌다. 뒷맛은 깔끔하게 딱 떨어진다. 혀 안쪽에 남는 약한 여운을 제하고는 아쉬울 정도로 뒷맛 없이 사라진다. 정이 안 느껴진다.

“그러게. 깔끔하긴 한데 정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나쁘게는 밋밋하기도 하고”

맑게 넘어가는 느낌은 좋다. 11도라 속이 먼저 반응한다. 가슴이 뜨뜻해지며 여운이 남는다. 근데 입에서는 여운이 없다. 뒷맛이 지나치게 깔끔해서 입에 남는 잔 맛과 잔향은 없다. 다랭이팜 생막걸리는 그저 깔끔하다. 덕분에 간이 세지 않은 ‘밀과 보리’의 감자전의 은은한 단맛이 잘 살아나지만, 찰진 어울림은 없다. 아쉽다.

“닭볶음탕 나왔습니다”. 감자전 시킬 때 같이 주문을 넣었던 닭볶음탕이 나왔다. 진홍빛의 걸쭉함이 바글바글 끓고 있다. 고추장을 제법 많이 넣고 끓인 닭볶음탕이다. 이토록 붉은 맛에 다랭이팜 생막걸리를 마시면,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막걸리 뭐 있나요?”

“해창하고 삼산 막걸리 있는데요”. 앗싸, 해남의 삼산 막걸리 9도가 ‘밀과 보리‘에 있다. 막걸리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밀과 보리‘는 좋은 막걸리를 잘 찾아놓는 안목이 있다.

“와 형, 이 막걸리는 맛있는데요"

“내가 사랑하는 막걸리야. 특히 진한 음식과 같이 마시기에 너무 좋아”

산미를 바탕으로 쌀의 애교 섞인 단맛과 쌉싸래한 술맛이 게미진 균형을 이룬 삼산 막걸리 9도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빨간 국물에 익은 닭봉 한 점을 베어 문다. 이런. 이번에는 안주가 심심하다. 북촌의 '밀과 보리‘는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음식 맛이 전체적으로 슴슴한 이유다. 덕분에 속 편한 집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닭볶음탕의 닭도 염지를 하지 않았고, 간에도 '다시마‘를 듬뿍 넣지 않았을 터이니, 강렬한 색감과는 달리 맛이 매우 순하다. 양념이 입에 들쩍하게 달라붙지 않으니, 꼭꼭 씹을수록 닭의 감칠맛이 살아나고 포슬포슬한 감자의 단맛도 쉽게 찾아진다. 닭고기에 감자에 붉은 국물까지 여러 맛이 섞여있는 입을 삼산 막걸리 9도는 개운하게 적셔준다. 특유의 맑고 깊은 산미가 닭볶음탕을 만나도 합이 좋다.

역시 삼산 막걸리 구도

“요즘 세네갈 갔던 친구들은 자주 만나니? 예전같이 모이는 거 같지는 않던데. 내가 모임 한번 주도할까?“

12년 전 코이카의 꿈 세네갈 편 출연자와 연출자로 만나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있는 후배가 멀뚱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한다. 잘 나오지도 않던 사람이 뭔 모임을 주도하냐고. 요즘 너무 한가한 거 아니냐며, 형은 겁나 바쁘거나 바쁜 척하면서 잘난 척을 해야 형 다우니, 괜한 소리 말고 빨리 바빠지란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기 힘들다. 괜스레 쿨한 미소 날리며 삼산 막걸리 9도를 홀짝인다. 맛있다. 어느새 닭볶음탕 국물이 제법 졸아있다.

고추장을 함량이 높아선지 졸아든 국물이 뻑뻑하다. 간이 세지 않은 국물이 뻑뻑하니, 맛이 어색하다. 졸아도 짜지 않게 먹을 수 있으니, 나름의 장점도 있지만 친숙하게 입에 감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익숙한 맛을 찾게 되고, 조미료를 넣게 된다. 간이 강한 음식에 중독됐다면 ‘밀과 보리’는 낯설 수 있다. ‘밀과 보리’의 미나리 전과 홍어 전이 유명세를 타는 이유는 강한 개성이 기여한 바가 클 것이다. 미나리와 홍어 둘 다 강한 향을 가진 식재료다. 강한 캐릭터의 미나리와 홍어를 깔끔하게 조리하니, 누구나가 쉽게 감동할 맛이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입이 조미료에 찌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밀과 보리’에서는 미나리 전과 홍어 전을 선택하시기 바란다. 막걸리는 맑고 깊은 삼산 막걸리 9도, 걸쭉함을 원한다면 해창 막걸리가 좋다.

“아이고 현민아, 덕분에 너무 잘 먹었다 “. 요즘 제법 번다며 계산을 한 후배의 뒷모습이 든든하다. 헤어지고 혼자 걷는다. 생각이 곁을 따른다. 아직도 바쁘고, 잘난 척하며 살고 싶은가?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이 긴 지금,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는 건가?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건가? 한가함 속에서 나를 채우고 있는 건가? 나를 잃고 있는 건가? ’밀과 보리‘에서 만나기를 잘했다. 늦은 밤 북촌 거리를 걸을 수 있다. 헌법 재판소 삼거리를 지나 정독 도서관 방향 오르막 길을 헤어지지 않는 생각과 더불어 너털너털 걸어간다. 아무래도 홍어 전을 먹을 걸 그랬다. 북촌의 길이 허전하다.

승발이의 맛 평가 : 다랭이팜 생막걸리는 11도의 도수에 비해 너무 무난하다. 특별한 개성이 없어 자칫 안주에 묻혀버리기 쉽다. 맑고 깔끔함을 찾는 사람에게는 추천할 만한 막걸리. 3.8(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밀과 보리’의 음식은 모두 수준 이상이다. 사람들이 많이 와 밑반찬이 예전보다 마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 그래도 추천할 메뉴는 단연 미나리 전과 홍어 전이다. 강하고 깔끔한 전의 전형을 맛볼 수 있다. ’밀과 보리‘에 삼산 막걸리 9도가 있다면, 단연코 일 순위 추천이다. 간이 세지 않은 ’밀과 보리‘의 음식에는 게미진 해남의 삼산 막걸리나 해창 막걸리가 어울린다. 옛 친구와 함께 있다면 동물원의 ’별빛 가득한 밤에‘를 곁들이시길. 멋진 추억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북촌의 ’밀과 보리‘는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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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썰다랭이팜남해

승발이-백반기행 피디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CP(책임 피디)로 전국의 맛깔나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을 하던 중 막걸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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