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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다, 표문 막걸리(서울, 한강주조)

승발이-백반기행 피디
- 8분 걸림 -

한 때 열풍을 일으켰던 곰표 맥주의 자매 브랜드라고 해야 할까? 막걸리 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주조장인 한강주조(네이버 광고에 출연했던)에서 만든 막걸리다. 다양한 막걸리가 출시되고 있는 요즘에 접한 가장 젊은 막걸리다. 6도의 시판 막걸리 표준 도수에 용량은 500ml로 소용량이다. 레트로 디자인이 심플하면서 재밌다. 뒤집어서 보면 '표문'이 '곰표'가 된다. 젊은 감각으로 엄청난 꾸밈이 예상되는 막걸리다. 근데 첨가물이 제로다. 요모조모로 흥미로운 막걸리다.

알코올 : 6도

원재료 : 정제수, 쌀(국내산), 국, 밀누룩, 효모

디자인이 귀엽다

첫 잔

헉. 허를 찔렸다. 시큼 달달한 맛이 입을 적신다. 하지만 많이 시큼하지 않고, 많이 달달하지 않다. 적당한 누룩향에, 탄산도 강하지 않다. 기껏해야 잽이나 톡톡 던지면서 화려한 풋워크로 잘난 척이나 하는 풋내기 복서를 예상하고 안면 가드만 하고 있다가, 묵직한 훅에 복부를 가격 당한 느낌이다. 근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젊은 취향의 서투른 화장기 가득한 맛이 담겨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정반대다. 오히려 전통의 맛에 닿으려고 노력한 맛이다. 짙은 아이보리색의 뽀얀 빛깔도 잘 숙성된 막걸리를 짐작케 한다.

둘째 잔

입안을 감도는 적당한 누룩향이 좋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목 넘김도 좋다. 과한 탄산을 자제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에 주안점을 두고 주조한 듯하다. 찬찬히 마시다 보니 탄산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질감 속에 탄산이 잘 숨어있다. 이 녀석으로 인해 예전 한강주조와 나루 생막걸리에 가졌던 생각을 지우게 된다.

2020년 11월에 나루 생막걸리를 구입해서 마셨다. 네이버 광고에 출연한 한강주조 직원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서울에서도 핫플레이스인 성수동에 주조장이 있다고 하니 더욱 흥미로웠다. 935ml의 기존 시판 기준을 파하는 용량도 특이했고, 롯데마트 기준 7,000원인 막걸리 가격도 특별했다. 상당한 호기심을 갖고 마신 막걸리 맛도 역시나, 특별했다. 단맛이 쪽 빠져있고, 술을 먹는 느낌이 센 녀석이었다. 새로 출시된 젊은 주조장의 프리미엄급 막걸리가 이런 맛을 낸다는 건 꽤나 용기 있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술맛의 임팩트를 단맛이 아니라, 쓴맛으로 잡는 건 막걸리 맛의 일반적인 흐름을 역행하는 결정이다. 찬찬히 마시니 나루 생막걸리도 단맛이 느껴졌다. 은은하게. 멋졌다. 달지 않은 막걸리 맛을 만들어낸 젊은 용기가 돋보였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했다. 산미도, 감칠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막걸리는 다른 발효주에 비해 향이 약한 대신 입을 감싸는 달달한 산미와 감칠맛이 월등한 술이다. 나루 생막걸리에서는 막걸리의 장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젊고 과감한 선택은 멋있으나, 치기 어린 맛이 담긴 술. 한강주조의 나루 생막걸리의 기억은 그렇게 정리가 됐었다.

셋째 잔

표문 막걸리는 점잖다. 농밀한 질감을 갖춘 막걸리가 점잖은 맛을 낸다. 500ml의 앙증맞은 사이즈에, 귀여운 디자인의 막걸리 병을 보며 마시니, 막걸리 맛이 더 특별해진다. 디자인이 주는 인상과 맛이 갖고 있는 질감의 다름이 주는 재미가 좋다. 시간이 지나니 산미는 줄고 단맛이 늘어났지만 과하지는 않다. 감미료로 첨가한 단맛이 아니라, 발효를 통해서 뽑아낸 단맛이다. 그래서 감칠맛이 있다. 맛이 깔끔하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텁텁함이 살짝 혀 위에 남는다.

매력적인 아프리카 술

아프리카에 아마룰라라는 술이 있다. 마룰라라는 열매를 발효시킨 술이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술이다. 부드러운 단맛 뒤에 17도의 멋진 쓴맛을 숨기고 있다. 기네스의 부드러운 크림만 농축한 듯한 빛깔과 입술에 닿는 질감이 육감적인 술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만드는 술인데, 구입한 곳은 탄자니아 공항이니 아마도 아프리카 전역에 퍼져있는 술로 짐작이 된다. 표문 막걸리의 빛깔과 단맛이 아마룰라와 닮아있다. 곡물을 살짝 태워, 정성스럽게 발효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색과 맛이 담겨있다.

넷째 잔

디자인 문구처럼 부드럽게 달달하게 넘어간다. 아쉬운 건 임팩트다. 외모가 주는 인상과는 다른 반전의 매력은 있지만, 술맛 자체가 주는 임팩트가 약한다. 강한 인상은 신맛-단맛-쓴맛 중 하나에 방점을 주면 얻기 쉽다. 절묘한 발란스를 통해서도 얻을 수가 있다. 표문은 적당하지만 강한 방점을 가진 임팩트가 없다. 절묘한 발란스에서 오는 아슬아슬한 긴장감도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녀석이 좋다.

표문 막걸리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하며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젊은 주조장에서 새로 출시한 막걸리는 화려한 꾸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이 막걸리를 마시기도 전에 지나친 단맛과 과한 탄산으로 치장된 맛일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막걸리는 반전의 맛이라는 맥락이 글을 지배하고 있다. 막걸리에 첨가물의 인위적 달달함을 주입했던 것은 젊은 세대가 아니었다. 싼 값에, 싼 재료로 맛을 만들기 위한 기성세대들의 결과물이다. 젊으니까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내가 걸어왔던 경로를 통해서 재생산된 내 인식의 복제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젊은 세대는 달랐다. 기성품의 복제 없이 순수하게 막걸리를 받아들이고, 장점을 살리려는 노력을 한 병에 담아냈다. 가양주 학교에서 만난 한강주조의 20대 젊은 직원의 말이 생각난다.

"술 만드는 유명한 회사에 다니면서 왜 여길 왔어요?"

"너무 실전이어서 이론과 원리를 제대로 알고 싶었어요"

젊은 세대가, 멋있다.

승발이의 맛 평가 : 산미와 단맛이 부드러운 질감 속에 잘 녹아있다.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맛. 4.5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웬만한 안주와 합을 맞춰도 무난히 어울릴 수 있는 막걸리다. 혹시 냉장고에 슬라이스 햄이 있으면 선택해서 함께 해볼 것을 추천한다. 의외로 합이 좋다. 음악은 찰리 푸스의 '마빈 게이'다. 젊고 감각 있지만, 편안하게 귀에 들어오는 곡이 표문과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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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발이-백반기행 피디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CP(책임 피디)로 전국의 맛깔나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을 하던 중 막걸리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