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뭐, 다, 막걸리지
8개월 동안 매일 마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막걸리를 마신다. 대학 졸업 이후로 처다도 안 보던 막걸리가 나의 일상을 마셔버린 것이다. 20여 년간 잊고 지내던 막걸리와 다시 연을 맺어준 건 산이였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향하기로 했던 프로그램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나자빠지고, 적적한 마음에 후배들과 올랐던 인왕산 하산길에 강렬히 이 녀석이 떠올랐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5월의 봄날, 인왕산도 버겁던 나의 허접한 육신이 본능적으로 막걸리를 갈구했음이 이유였을까?
청운동 창신갈비에서 20여 년 만에 주문한 장수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켠 후 난 헤어 나올 수 없는 술독에 빠지고 말았다.
일일일막. 2020년 6월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마시고 있다. 매일 저녁밥 대신 막걸리 한 통을 마신다. 어쩌다 만나는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에서도 막걸리다. 지방 촬영날 숙소에서도 막걸리다. 집에서도, 산에서도, 강남에서도, 강북에서도. 매일매일 막걸리다.
운도 좋았다. 막걸리와 운명의 재회를 한 이후 난 산과도 사랑에 빠졌고, 매주 등산에 단련되어가는 몸은 더욱 막걸리를 갈구했다. 일도 막걸리와의 로맨스를 도와줬다. 거의 매주 반복되는 지방 촬영은 지역 막걸리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풍족히 제공했다. 팔도 막걸리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길이 나의 일 속에 있었다.
강원도와 전라도의 막걸리가 다르고, 몇 명 살지도 않는 경상도 외딴 동네에서 만난 막걸리도 달랐다. 건달 같은 놈, 수줍은 놈, 겉멋 가득한 놈 등등등 이놈 저놈 온갖 놈들이 서로 다른 맛과 개성으로 살고 있었다. 내가 위스키와 소주와 백주, 각종 맥주에 탐닉해 있던 그 순간, 어딘가에서는 가장 싼 값에, 가장 다양한 놈들이 전국의 일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750ml 한통에 1500원이면 난 팔도의 개성을 즐길 수 있다. 행복한 알딸딸함으로 밤을 즐길 수 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콩나물, 돈까스, 김치, 삼겹살, 된장찌개, 핫도그, 새우깡, 우럭회 등등 어울리지 못하는 음식이 없다. 부엌에 있는 그 어떤 녀석과도 합을 맞출 수 있다. 이렇게 넉살 좋은 술을 난 지금껏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다. 이 녀석과의 걸쭉했던 만남을 기록하고 싶어 졌다.
신 놈, 단 놈, 쓴 놈, 싱거운 놈, 맛없는 놈 등 온갖 막걸리들과의 다양한 만남의 기록.
마셔보니 사는 게 뭐, 다, 막걸리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