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를 갈아 넣은, 선희10(충주, 중원당)

‘사랑이 사무치고 그 상실이 너무나 쓰라려서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은희경, '마이너리그’ 중


세상이 언제부터 술에 취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길게는 대략 3만 년 전부터 술 비슷한 음료를 마시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추론을 한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가장 오래된 알코올 음료의 흔적은 중국에 있다. 중국 중북부 허난성의 자후 지역에서 공동묘지로 짐작되는 기원전 7000년 전의 신석기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토기의 잔존물을 분석한 결과 포도주, 벌꿀주, 쌀 발효주가 혼합된 성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적어도 9000년 전에 세상은 한 잔 걸치고 좋은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9000년 전에도 사무치고, 너무나 쓰라리면 취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기원전 4세기 이집트 묘비 석판 조각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기분을 봉봉 띄워주는 발효주만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만족하지 않고 뭘 집어넣기 시작했다. 취하면 알딸딸해지는 기분을 극대화시키기로 노력한 것이다. 기원전 2000년으로 추산되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유적지의 항아리에서 알코올 성분과 함께 마황, 대마 꽃과 씨, 양귀비 꽃가루 등 환각 물질이 발견되었다. 주술적 용도로 술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유적지도 조로아스터교의 성전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록으로 발견되는 아편 칵테일도 있다. 기원전 700년 전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는 ‘시름을 잊게 하는 약(nepenthe)’라 불린 묘약 덕분에 트로이의 펠레네가 슬픔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학자들은 펠레니가 마신 ‘모든 걱정과 슬픔, 언짢음을 없애주는 허브’를 섞은 와인이 아편 성분이 들어있는 술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양귀비 밭. 보기만 하면 참 아름다운데 인간의 욕심은 종종 엉뚱하게 흐른다

장미, 알로에, 월계수, 코리엔더 등 낯익은 식물에서부터 올스파이스, 안젤리카, 아티초크, 나도후추이브, 향모, 창포, 캐러웨이, 카다멈, 정향, 코카, 에라토래아센타우리움 등등등등. 이름 모를 허브와 향신료까지 마셔서 죽지 않을 것들이면 인류는 술에 다 넣어보고 있다. 오죽하면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한 양조업자는 이런 말까지 했을까. “우리는 장모님만 빼고 모든 것을 증류합니다”


막걸리도 예외는 아니다. 밤, 땅콩, 잣, 바나나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간식 곡물 웬만한 건 다 넣어보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혼합 막걸리가 합성착향료와 과도한 단맛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술 빚기 명인의 대를 잇고 있는 충주의 중원당에서 출시한 ‘선희10’ 막걸리는 예외지만.

알코올 : 10도

원재료 : 정제수, 찹쌀, 맵쌀, 오렌지, 누룩

‘MZ세대의 톡톡 튀는 레트로 감성을 담은 선희10. 피크닉, 캠핑, 홀 파티에 추천합니다’

만나 본 막걸리 중 가장 트렌디하다. MZ세대의 감성을 담았다는 마케팅 포인트를 명확하다. 전통 방식으로 술을 뽑아내고, 오렌지를 첨가했다. 오렌지 외에 인위적인 첨가물은 전혀 없다. 호가든, 1664 블랑 같은 가향 맥주를 벤치마킹한 막걸리라고 생각된다. 도수가 10도다. 네이밍도 재미있다. 맛도 궁금하다.


첫 잔

향이 묘하다. 새콤달콤한 향이 올라온다. 마치 청량음료수의 향과도 닮아있다. 빛깔은 병아리 색을 닮은 옅은 옥수수 막걸리 빛이다. 여러모로 외모가 호기심을 갖게 하는 녀석이다. 마셔보자. 단맛은 없다. 오렌지의 단맛 뺀 산미가 술맛을 지배하고 있다. 뒷맛에 남는 쌉싸름함은 10도 막걸리가 가질 수 있는 기본 정도다. 기본기는 갖췄지만, 술맛의 발란스가 어설프다. 맛이 없다는 말이다. 오렌지와 막걸리가 가진 단맛은 크게 없고, 묘한 들쩍함이 입천정을 적신다. 향도 작위적이다. 디자인의 세련된 기대감이 첫 잔에서 무너진다.

둘째 잔

탄산이 적은 막걸리다. 그렇지만 부드러운 목 넘김은 아니다. 오렌지 입자로 생각되는 거친 앙금이 입술을 치고 지나간다. 술 앙금은 아니다. 곱게 갈렸지만, 오렌지 입자가 앙금에 섞여 술의 촉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희 10은 걸쭉하지도, 맑은 질감도 얻지 못했다. 찬찬히 호흡하며 마시니 오렌지 껍질 씹었을 때의 쓴맛이 혀 안쪽에 묻어난다. 10도의 술이니 일반 막걸리보다 쌉싸름한 술맛은 당연하고, 여기에 오렌지 껍질이 더해지니 입안에 남는 쓴맛이 상당히 강하다. 여전히 맛의 조화가 부자연스럽다. 쌀, 물, 누룩, 오렌지만으로 만든 술인데 화학 첨가물이 들어간 듯한 맛이다. 오렌지가 막걸리와 궁합이 맞는 조합인지, 왜 오렌지를 넣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오렌지 막걸리. 네이밍은 매우 흥미롭다

막걸리와 맥주는 쌍둥이다. 쌀로 빚으면 막걸리고, 보리(맥아)가 발효되면 맥주가 된다. 막걸리도 이양주로 담그면 탄산과 산미가 매우 강하다. 드센 술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쌀을 더주어 삼양주, 사양주로 만들어 단맛을 보강하고 산미와 누룩향을 보듬는다. 고급 기술이다.

맥주는 덧술 대신 가향을 택했다. 아주 오래오래 전, 당도와 산도가 약해 금방 맛이 변질되어 쿰쿰해지는 맥주의 단점을 메우기 위해 온갖 약초가 동원되었다. 서양톱풀, 향쑥, 메도스위트 등 향이 강한 풀에서부터 독미나리, 벨라도나, 사리풀 등 치명적 독이 있는 풀도 맥주 발효조로 향했다. 때로는 맥주를 마시고 영영 깨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맥주 맛 유지를 위한 유럽인들의 절박한 아둥바둥은 이것의 유입으로 한 방에 해소가 된다. 800년 경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홉’이다.

현대 맥주의 핵심, 홉

씁쓸한 향미를 가진 홉은 맥주의 단점을 혁명적으로 해소했다. 기분 좋은 씁쓸함이 쿰쿰함을 제어하고, 맛과 향을 맥주에 녹여냈다. 홉의 알파산은 오크통에서 쉽게 상해버리던 맥주의 보관 기간을 늘려줬다. 인디아 페일 에일(IPA)은 강한 홉의 풍미와 쓴맛을 특징으로 한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던 시절, 영국의 맥주를 인도까지 무사히 운반하기 위해 홉을 무진장 때려 넣기 때문이다. 홉은 맥주 입장에서는 동방에서 온 보물이었다. 맥주의 상징인 풍성한 거품마저도 홉이 준 선물이니까. 그렇지만 맥주가 곧 호프(홉)는 아니다. 맥주는 보리나 밀의 발효액체고, 홉은 단지 가미, 가향을 위한 첨가제다. 단순 첨가물이 1000 년을 넘어 맥주와 동일시되는 위상을 갖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맥주의 치명적인 단점을 완벽히 보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잔

오렌지가 첨가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상당히 맑고 괜찮은 막걸리였을 거 같다. 편견에 얽매인 평가일지 몰라도, 오렌지와 순 막걸리의 본질이 섞이지 않고 있다. 오렌지의 쓴맛이 오히려 사카린 막걸리의 뒷 쓴맛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유가 뭘까? 이질적인 맛을 포용해줄 감칠맛이 없다. 쌀 도정률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단맛도 약하고, 감칠맛도 희미하니 이질적인 맛만 도드라진다. 남은 술의 쓴맛이 매우 강하다. 오렌지 입자의 거친 앙금이 마치 어릴 적 가루약을 수저에 풀어서 먹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쓴맛과 질감이 남는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맥주 중 하나가 호가든이다. 밀로 빚은 벨기에 막걸리라고 보면 된다. 탁한 노란색의 호가든이 한국에서 유독 인기를 끈 이유는 상큼한 단맛과 산미 때문이다. 호가든에는 오렌지 껍질과 코리엔더 열매가 첨가되어있다. 강한 레몬향을 갖고 있는 코리엔더 열매와 오렌지 껍질이 밀 맥주 특유의 농밀한 질감과 어우러져, 달콤한 과일향과 산미를 맥주에 녹여낸다. 맥주 맛을 오렌지 껍질과 코리엔더 열매가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다.

첨가물은 정확한 자기 역할이 있어야 한다. 홉은 맥주의 단점을 완벽히 상쇄해주었고, 오렌지 껍질과 코리엔더는 호가든의 맛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어설픈 티내기식 첨가물은 소비 생태계에서 생존할 수도, 진화할 수도 없다.

넷째 잔

선희10에 첨가된 오렌지의 역할을 찾을 수가 없다. 이 술을 다시 찾을 동인도 발견할 수 없다. 갈아 넣은 오렌지의 씁쓸함이, 잘 담근 막걸리의 감칠맛을 가리고 있다. 개성 있는 디자인과 오렌지색 막걸리의 고운 때깔이 맛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 하나만으로 평가받기에는 330ml에 10000원이라는 가격이 너무 무겁다. 이 녀석을 뽑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였음도 무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만큼의 아쉬움도 느껴진다.


승발이의 맛 평가 : 새로운 시도와 디자인만으로 평가받기엔 용량은 가볍고, 가격은 무겁고, 맛은 모호하다. 3.3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합정시장 부근에 금강산 호프라는 멋진 술집이 있다. 경험한 호프집 중 가장 다양한 세대를 포용하고 있는 금강산 호프의 대표 안주는 '멕시칸 사라다'다. 샐러드가 아닌 사라다. 채 친 햄과 양파, 사과 등을 마요네즈를 담뿍 넣어 비빈 멕시칸 사라다. 고소, 달달, 새콤, 매콤한 사라다 한 입에 선희10 한 잔은 꽤 괜찮은 조합일 것이다. 파티용으로 기획된 막걸리 선희 10이니, 보니 엠의 ‘Sunny’도 아주 나이스한 선택이고.

https://youtu.be/ghGiv7YLC7Q

참고자료

- 술의 세계사(패트릭 맥거번)

- 맥주 상식사전(멜리사 콜)

- 술 취한 식물학자(에이미 스튜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