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향음표준(경북 군위, 나린증류소)
새벽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다 밤이 되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직은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지만, 그래서 더 살결에 밀착이 된다. 바람이 에어컨을 꺼트리고 선풍기도 밀어낸다. 끝여름의 숨결이 습자지 같은 감성을 나풀나풀 흔들어 댄다.
귀뚜루루루--
귀뚜루루루--
보내는 내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하나 울릴 수 있을까
누구의 가슴 위로 실려갈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우는 내 울음소리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소 - 안치환 ‘귀뚜라미’ 중-
안치환을 오랜만에 듣는다. 묵직하고 거친 질감이 정직하게 베인 노래다. 참 열심히 부르고, 참 잘 부른다. 향음표준 막걸리는 안치환을 닮았다.
-이 술은 우리술문화원 향음이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재래종 토종벼를 복원하려는 회의들의 뜻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술입니다- 나린증류소
알코올 : 12도
재료명 : 쌀 1 : 누룩 0.1 : 물 1.7
막걸리 레시피까지 상세히 적어놓은 최초의 막걸리다. 정직하게 만든다는 신념과 자신감의 표현이다. 자가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
첫 잔
서리태 두유를 닮은 듯 검은빛이 도는 뽀얀 술색이 제법 진하다. 고소한 향이 솔솔 풍긴다. 마셔보자. 어라, 맑게 넘어간다. 질감은 보드라운데 목 넘김은 맑고 드라이하다. 혀를 타고 넘어가는 술맛이 시큼하다. 단맛이 완벽히 절제되어 있다. 산미 뒤에 은은하고 고소한 풍미가 단맛을 대신한다.
잔재주를 부린 흔적이 아예 없다. 직접 키운 쌀에, 직접 빚은 누룩으로 묵묵히 빚은 술맛은 투박하지만 정직하다. 향음표준 막걸리에서 단맛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단맛이 전혀 없네요. 이런 막걸리 참 드문데”
“우리술 문화원의 술은 그래요. 단맛이 없죠. 이게 우리 문화원 막걸리 맛의 기준이라는 의미로 ‘향음표준’이라고 했어요”
경북 군위 나린증류소에서 만난 이화선 대표는 차분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를 가졌다. “쌀 소비 증진을 위한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우리 술 빚기를 시작했어요. 제가 자발적으로 한건 아니고, 선배들이 하라고 해서.. 하하하”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이제는 우리술 문화원장 직을 내려놓고 경북 군위에서 주조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이 향음표준이다.
둘째 잔
술이 느껴진다. 시큼함에 숨어있던 씁쓰레함이 스쳐간다. 그만큼 산미가 강하다. 탄산은 없다. 발효 후 충분히 숙성된 막걸리다. 입술에선 보드랍고, 입에선 묵직하고, 목에선 차분하다.
향음표준의 맛은 진중하다. 발랄함이나 가벼움을 맛보기에는 꽤나 진지하다. 장남의 책임감 같은 무형의 무거움이 술에 묵직하게 녹아있다. 여럿이 왁자지껄 경쾌한 술자리에 어울리는 막걸리는 아니다. 귀뚜라미 울어대는 초가을 밤 혼술 자리에, 거친 노동의 굵은 땀방울을 식히는 그늘 아래 한 잔 목축임에, 마주 앉아 주고받는 말없는 술잔이 어색하지 않은 친구에게 어울리는 막걸리다. 안치환의 노래처럼.
셋째 잔
시큼하다. 시큼하고 씁쓸하다. 시큼하고 씁쓸하고 묵직하다. 막걸리에 술을 빚는 사람이 느껴지면 좋은 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향음표준은 좋은 술이다. 사라져 가는 토종쌀을 복원하고, 농민을 위해 쌀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술맛에 담겨있다. 묵직하게. 사회적 의미를 담은 술이 가벼울 수는 없다.
안치환의 노래를 들으며 늘 생각했다. 조금만 가벼우면 어떨까.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가, 소외된 자들을 위한 변화의 열망이, 평등을 향한 뜨거운 목마름이 그의 노래엔 너무 가득 담겨 있었다. 안치환의 노래를 사랑했기에 바랬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더 오랜 시간 동안 흐르기를. 그래서 조금만 힘을 빼기를. 향음표준도 그렇다.
- ‘나린의 술’에는 수천 년 한국 술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 나린증류소 홈페이지
좋은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이토록 깊은 의미를 공감하며 막걸리를 마실 소비자는 ‘거의’ 없다. 옮음을 공유하기 위해 조금만 가볍고 경쾌한 스텝을 밟아보는 건 원칙의 오류일까. 술은 마셔야지 전파가 된다. 많이 마셔야 널리 퍼질 것이다.
... 라고 글을 맺으려 했다. 그런데
서이초 교사 49제에 참여한 동료들을 해임한다고, 소련 공산당 참여 경력 때문에 홍범도 장군 흉상을 옮긴다고 한다. 미친 위정자가 지배하려는 위험한 세상이다. 미치고 팔짝 뛰겠는 세상에 소중한 가치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는 모든 이들을 응원 해야한다. 한 없이 가벼워만 지는 미친 세상의 중심을 잡으려는 묵직한 발걸음을 칭송 해야한다.
승발이의 맛 평가 : 향음표준은 조금만 가벼워질 수 있을까? 4.0(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불맛으로 가볍게 가미한 낙지구이와 함께하면 다소 직선적인 막걸리 맛을 다채롭게 보완할 것이다. 아! 나린증류소의 술 중에 청주(약주) 라인이 있다. 막걸리를 맑게 뜬 ‘향음표준 술’과 ‘수울 술’은 경쾌한 산미와 아주 연하게 깔리는 단맛이 아주 좋다. 향음표준 탁주에서 나온 술이 맞나 의아할 정도로 밝고 가벼운 청주(약주)를 뽑아냈다. 강력 추천이다. 안치환의 ‘귀뚜라미’도 강력추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