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맥주의 친구, 봉화 생막걸리(경북, 봉화탁주합동)

전체 인구의 약 95%가 조선시대부터 살아온 토박이들의 지역이 있다. 한 집 건너 다 친인척 동네라는 의미이자, 그만큼 외부에서 인구 유입이 되지 않는 ‘오지'이다. 덕분에 전국 공시지가 최하위를 기록도 해봤으며,  인구는 줄고 또 줄어 3만 명을 갓 넘긴 30,039명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대도시 중심의 사고로는 낙후된 지역이지만, 이런 곳일수록 고유의 식문화 생태계가 발달해 특별한 먹거리가, 동네잔치에 임영웅 등장하듯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교류는 점점 적어지고 우리끼리 살다 보니, 우리끼리 하던 대로 살아왔고, 우리끼리 빚던 대로 술을 만들었고, 또 그랬더니 외지인은 우와 이런 신기한 게 다 있냐며 호들갑을 떠는 그런 경우. 경북 봉화의 봉화 생막걸리를 마신 나처럼.

밀 100%의 보기 드문 경북 봉화의 밀막걸리

알코올 : 6도

재료명 : 정제수, 밀가루, 종국, 곡자, 분국, 삭카린나트륨, 아스파탐

막걸리 통에 아직도 ‘삭카린나트륨’이라고 적는 투박함이 정겹다. 게다가 100% 밀 막걸리다. 의외로 밀 100%로 만든 생막걸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쌀이 넘쳐나는 시대에 굳이 밀로 막걸리를 담을 이유도 없고, 80~90년대 속이 느끼할 정도로 들쩍지근하고 텁텁한 맛 때문에 생긴 선입견도 있으니 굳이 밀 막걸리를 찾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흔하디 흔하던 것이 세월이 지나니 희귀해진다.

첫 잔

“아이쿠. 얘를 제대로 흔들지 않고 따라 버렸네”. 나는 막걸리를 꼭 흔들어서 앙금과 섞어 마신다. 굳이 위에 뜬 맑은 술만 마시려면 청주를 먹지 막걸리를 마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허나 어쩌랴. 대충 한번 흔들고 막걸리의 맑은 부분만 따라 버렸으니 마실 수밖에. 그런데. 와우. 뭔 일이람. 맛있잖아.

한국에서 밀 막걸리는 국가 정책의 산물이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쌀로 뭔 술을 만드냐며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쌀을 이용한 술 제조를 금지하였다. 그렇다고 술을 안 만들고 안 마실수는 없는 법. 미국 등에서 들어온 원조 밀가루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 ‘밀가루 막걸리‘의 시작이다. 밀 막걸리의 역사는 기껏해야 70여 년 남짓이다. 1990년 막걸리에 쌀 사용이 허용된 이후에도 밀 막걸리는 쌀 보다 우월한 경제성으로 꾸준히 제조되어 왔다.  2000년대 들어 쌀 소비량이 급격히 줄고 수입쌀도 넘쳐나니, 값이 싸진 쌀로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이 늘어났고, 2008년 막걸리의 반짝 인기 이후 고급화 바람이 불면서 밀가루에서 쌀로 막걸리의 대세가 이동하게 된다. 물론 고급화는 명분일 따름이다. 예전에 빚던 주재료로 돌아간 것뿐이다. 다만, 경북 봉화처럼 쌀이 흔하지 않고, 교류도 적은 산간 지역은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게, 묵묵히, 하던 대로 밀막걸리를 빚어 왔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희귀템이 되어 버린 것이다.

봉화 생막걸리를 흔들지 않고 맑게 마시니 이게 밀막걸리 인가 싶다. 맛이 절묘하다. 노르스름한 술빛 속의 감미가 산뜻하다. 옅은 바닐라 향의 단맛이 술 속에 맑게 퍼져 있다. 깨끗한 맛이다. 감미와 산미가 은은하게 블렌딩 되어서 산뜻한 술맛을 준다. 입안이 상큼하다. 이 녀석을 닮은 친구를 어디선가 만난 거 같은데. 설마 그 녀석 맞을까?

둘째 잔

밑술이 섞여 첫 잔보다 농후해졌다. 뒷맛에 살짝 사카린 감미 특유의 쌉싸름함이 지나가지만 아주, 아주 약하다. 여전히 밀막걸리 특유의 들쩍함이 없다는 점이 놀랍다. 다른 지역에서 마신 밀막걸리의 쉽게 질리는 단맛과 봉화 생막걸리는 다르다. 웬만한 쌀막걸리도 보다 상위 레벨이다. 상큼한 산미가 더해진 덕이다. 그래. 이 녀석은 그 친구를 닮았다. 풍미가 좋은 밀맥주. 맛과 향이 멋들어진 상위 레벨의 독일 밀맥주의 정취가 봉화 생막걸리 맛에 담겨있다.

과거 독일에서 밀맥주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나누는 척도였다고 한다. 1516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에서 이른바 ‘맥주순수령’을 발표한다. 먹고 죽을 밀도 없는데 어찌 맥주를 만드냐며 보리, 물, 홉만 써서 맥주를 만들라는 법이다. 하지만 방귀 제법 꿔대던 부유층에게 맥주순수령은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밀맥주만의 풍만한 향과 달콤한 맛을 굳이 외면하고 싶지 않았던 탓에 뮌헨의 왕실 양조장은 꾸준히 지주와 귀족들을 위한 밀맥주를 양조했다고 한다. 있는 놈들의 차별화된 욕망은 동서고금 참 한결같다. 어째꺼나 역사적으로 밀맥주가 양조되어 온 덕분에 지금은 맛이 찰찰 넘치는 밀맥주가 다수 출시되고 있다. 남해 독일마을에서 쉽게 맛볼 수 있는 ‘아잉거 브로바이스’가 그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녀석이 봉화 생막걸리와 참 많이 닮아있다.

독일마을에서 만난 아잉거 브로바이스

시중에서는 만나기 어렵지만, 남해 독일마을의 펍이나 레스토랑에서 가장 많이 팔고 있는 맥주가 ‘아잉거’ 밀맥주다.  발효가 끝난 에일 밀맥주를 깔끔하게 정제하여 병입 한 '아잉거 브로바이스'는 맛과 향, 그리고 술색까지 봉화 생막걸리의 정서와 참 많이 닮아있다. 달큰한 바닐라 향이 은은하게 피어나는 노르스름한 술빛을 한 모금 마시면, 입 안에 달큼함과 연한 산미가 풍요롭게 퍼진다. '이야 이게 밀맥주구나'라는 즐거운 감탄이 몸을 적신다. 이 멋진 맛의 맥락이 봉화 생막걸리의 맑은 술에 닿아있다. 입술을 유혹하는 하얀 거품만 없을 뿐, 바닐라 향을 살짝 품은 부드러운 단맛과 산미는 에일 밀맥주 아잉거 브로바이스의 그것과 참 많이 닮았다.

아잉거 마시는 법을 알려준 독일마을 비스트로 36의 멋진 사장님. 아래술 20%는 흔들어 따르라고

밀맥주 아잉거와 밀막걸리 봉화 생막걸리 맛의 친밀함이 혹시 ‘밀’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일까 하는 생각에 대구의 유명 막걸리인 생불로 밀막걸리의 맑은 윗술만 마셔보았다.


생불로 밀막걸리(대구불로탁주)

알코올 : 6도

재료명 : 밀가루, 입국, 누룩, 젖산, 정제효소, 아스파탐, 구연산

대구의 유명 막걸리 

나쁘진 않다. 하지만 감칠맛이 좋은 청주를 마시는 기분이지 밀맥주를 연상시키는 맛은 아니다. 밀맥주와의 닮은 맛은 봉화 생막걸리만의 캐릭터다.


셋째 잔

잔을 거듭할수록 아랫술의 앙금이 섞여 질감이 농밀해진다. 아이보리 빛깔보다 조금 진한 연노란색의 술 빛깔이 곱다. 앙금이 많이 섞여 농밀해진 술맛은 강하다. 맑은 윗술과 달리 산미가 앞장을 서고  단맛이 뒤를 받쳐주니, 새콤한 요구르트 맛이 생성됐다. 재밌다. 청량감도 좋다. 농밀하지만 탄산감이 있어 시원한 목 넘김을 준다. 밀막걸리가 이 정도면-이 말도 편견일 수 있지만-베스트다.

봉화 생막걸리는 섞지 않고 맑은 윗술을 마시는 게 특별한 선택지이다. 개인적으로 막걸리의 맑은 술만 마시는 걸 강력히 반대하지만, 봉화 생막걸리는 다르다. 첫 잔의 쇼킹함이 너무 큰 까닭이다. 최상급 밀맥주 아잉거 브로바이스를  마시는 기분이 첫 잔에 담겨있다. 밀맥주의 은은한 단맛에 막걸리의 시큼한 정서가 더해진 아주 훌륭한 맛이 맑은 술에 있다.

승발이의 맛 평가 : 맑은 윗술이 워낙 강한 인상으로 다가와서 그렇지, 흔히 마시듯 섞어 마셔도 훌륭한 막걸리다. 밀막걸리는 들쩍하고 텁텁하다는 편견을 깨 주는 멋진 맛. 4.5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수제 소시지에 양배추 절임과 마시면 마치 독일 펍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색다름을 경험할 수 있다. 전통적인 안주와 미시려면 봉화 명물인 돼지숯불구이와 함께하기를 강추한다. 장작으로 구운 투박한 돼지구이를 멋들어지게 품어주는 막걸리를 입에서 만날 수 있다. 독일팝 네나의 '99 Luftbaloons'로 기분도 띄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