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갈라파고스', 영동 생막걸리
찰스 다윈이 그 유명한 '진화론'의 모티브를 발견했던 섬. 육지로부터 고립되었기에 독자적 생태계로 생존할 수밖에 없었던 섬. 본류로부터 동떨어져 있었기에 현 인류의 보물섬이 될 수 있었던 섬. 갈라파고스. 맛에도 갈라파고스 제도와 같은 섬이 있다.
메인 스트림에서 고립되어 있기에 가치를 획득한 곳. 화려한 조미료와 효율적인 조리법으로 세상의 맛이 변화하는 동안, 묵묵히 옛 방식 그대로 머물러 있는 곳. 세상의 발전에서 도태되어, 맛의 보물섬이 된 곳. 그곳을 나는 '맛의 갈라파고스'라고 생각한다. 충북 영동이 그렇다. 그곳에서 나는 갈라파고스의 샘물 같은 막걸리를 발견했다. 영동 생막걸리다.
개인적으로 만 원 이하의 식당에서 조미료 탓을 하지 않는다. 조미료 사용도 조리 기술일 뿐만 아니라, 만 원 이하의 대중식당에서 조미료 탓하면 음식을 만들 수가 없다. 그건 현실적 맛을, 가성비 있게 만들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대중식당의 '진화'이다. 막걸리도 마찬가지다. 1500원 수준의 대중 저가 막걸리는 그 가격대에 맞는, 생존을 위한 진화가 필요했고, 그렇게 선택된 방법론 중 하나가 '입국'이다.
일본에서 개발된 것으로 알려진 입국은, 쉽게 말해서 술 제조용으로 배양된 단일 효모종의 누룩이다. 포대 자루에 가공된 쌀가루와 입국이 잘 혼합되어 담겨 있고, 이를 물과 잘 섞어 발효시키면 막걸리가 된다. 참으로 쉽고 편한 공정이다. 고두밥을 찌고 식힐 필요도, 누룩을 띄우고 부술 이유도 없다. 그저 포대를 뜯어서 입국을 물에 넣으면 끝이다. 동네 마트에서 쉽게 저가에 살 수 있는 모든 막걸리의 성분표를 보라. 대부분의 막걸리에서 '입국'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것이다. 이 방법이 보급됨으로써, 일정한 품질을 갖춘 저가 막걸리가 대중화될 수 있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막걸리의 진화다. 그런데.
영동 생막걸리는 진화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영동 생막걸리의 성분표에는 입국이라는 단어가 없다. 대신 '누룩'이라는 고색창연한 단어가 생경하게 찍혀있다.
첫 잔
어라? 깔끔하다! 들쩍지근하고 텁텁할 것이라는 편견을 첫 모금에 씻어내는 맛이다. 좋은 단맛이 입안을 적신 뒤에 남는 은은한 쓴맛이 아주 좋다. 탄산도 의외로 강하다. 세련된 맛이지만, 깍쟁이처럼 정 안 가는 맛이 아니다. 누룩의 쿰쿰한 잔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발효 관리가 잘 된, 단맛이 주도하는 깔끔한 막걸리를 충북 영동에서 만났다.
둘째 잔
단맛이 좋다. 수입쌀에 밀까지 섞은 막걸리의 맛은 보통 들쩍 하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단맛이 상쾌하다. 짠지 안주와 마셔도 좋고, 기름진 돼지갈비와 합을 맞추니 더 좋다. 유통 5일 차 막걸리의 맛이니, 보름 정도 유통과정에서 더 숙성되면 산미가 올라오고 단맛이 지금 보다는 약해져서 더 좋을 듯하다. 특히 마신 후 뒤에 남는 쌉쌀함이 영동 생막걸리의 깔끔함의 숨은 주연이다. 성분표를 보니 이 녀석은 7도다. 아하! 기분 좋은 쌉쌀함은 도수였다. 막걸리도 도수를 낮춰 5도짜리 막걸리도 나오는데, 이 녀석은 1도 높은 7도다. 맛의 갈라파고스, 충북 영동의 막걸리답다.
충북에서도 맨 끝자락이고, 충남, 전북, 경북과도 맞닿아 있는 영동의 자그마한 마을에 선미식당이라는 중국집이 있다. 낡은 철제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는다. 연식을 알 수 없는 묘한 서체의 차림표를 올려 보고, '짬뽕'을 골라 주문한다. 격자의 비닐 상보 위에 단무지와 춘장이 깔린다. 그리고 내 귀를 의심하는 소리가 들린다. 텅, 텅, 텅. 그리고 잠시 침묵. 다시 텅, 텅, 텅, 텅. 도마를 내려치는 맛있는 반죽 소리가 조그마한 선미식당을 감싼다. 텅, 텅, 텅 소리와 함께 단무지는 닥꽝으로, 양파는 다마내기로, 춘장은 따장으로 변한다. 텅, 텅, 텅, 텅, 소리는 시간을 뛰어넘는 마법과도 같은 맛의 소리이고, 보통의 진화를 거부한 주인장 고집의 소리이다. 스뎅 사발에 빨갛게 담겨 나온 마법과도 같은 영동 선미식당의 짬뽕의 맛은 갈라파고스 섬처럼 독보적이다. 짬뽕 명가들의 특징인 채 썬 돼지고기는 여기서도 발견되고, 이곳의 독보적인 특징은 마치 밀떡을 씹는듯한 면의 식감이다. 여름에는 부추, 겨울에는 시금치와 돼지고기, 오징어가 밀떡 같은 면의 식감과 어우러져 멋진 맛을 선사한다. 모두가 기계 반죽으로 진화하는 동안, 외딴 영동의 시골마을에서 묵묵히 수타를 쳐온 주인장의 독보적인 짬뽕 맛은, 아름답다. 누룩으로 발효시킨 영동 생막걸리 맛도, 아름답다.
셋째 잔
아래 남아있던 앙금이 섞여서 인지 적당한 걸쭉함이 느껴진다. 술의 밀도가 짙어진 만큼 술맛도 짙어졌지만, 단맛이 더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쌉쌀한 술맛이 좀 더 느껴지면서 맛의 밸런스가 더 좋아졌다. 기분 좋은 누룩향은 덤이다.
넷째 잔
여전히 좋다. 사발에 담긴 막걸리를 보니 막걸리의 얇은 유막이 떠있다. 이게 영동 생막걸리 맛의 비결인가?
승발이 맛 평가(5점 만점) : 1500원에 누룩으로 띄운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단맛과 쌉쌀함의 멋진 발란스는 영동 생막걸리의 핵심. 부디 영동만의 독자적 맛의 생태계가 유지되었으면. 4.5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영동 갑돌식당의 오돌갈비와 함께하면 영동 생막걸리와 기가 막힌 궁합이다. 특히 이 집의 물김치와 영동 생막걸리의 궁합은 절묘하다. 영동 갑돌식당까지 늘 갈 수야 없으니, 대안으로 적당한 기름기와 살코기의 탄력이 어우러진 돼지 생갈비와 파김치를 함께 해볼 것을 추천한다. 뭐하고야 안 어울릴 맛이겠냐만은 발란스가 좋은 영동 생막걸리와는 특히 좋을 듯하다. 록과 블루스의 경계에서 멋진 연주 발란스를 보여주었던 스노위 화이트의 음악이 있으면 더욱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