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진주의, 쇠미골 생막걸리(진주, 진주탁주공동운영회)

우연치 않은 인연이 주기적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다. 혈연으로 연결되는 공간이 고향이라면, 학연으로 이어지는 모교가 있다. 군대와 직장을 다니며 맺어지는 삶의 터전이 있고, 연애와 결혼으로 보금자리가 마련된다. 혈연도 학연도 없고 사랑도 없는데 연의 끈이 매듭을 맺는 곳. 나와 논리적 선이 닿아있지 않은 곳이 우연한 기회로 계속 나의 추억에 일정한 영역을 남기는 곳. 진주가 그곳이다.

진주 진양호

인연의 시작은 제작 프로그램이다. 20년 전 여행 프로그램으로 찾은 진주는 남남북녀 양준혁-김은아 커플의 이별 공간으로 다시 만났고, 허영만의 백반기행으로 추억의 영역을 넓혔다. 나의 의지가 아닌, 프로그램의 흐름에 실려 간 곳이지만, 진주는 언제나 좋았다. 지방 여느 도시의 부산스러움도, 쇠락한 옛 도시의 탁한 회색빛 이미지도 아니었다. 새벽시장의 복작거림은 정겨웠고, 개와 늑대가 만나는 시간의 남강변 거리는 세련됐다. 아쉬움은 음식이었다. 맛이 없는 아쉬움이 아닌,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첫 인연에서 만났던 육회 비빔밥은 너무 멀어 기억의 영토에 흔적이 남지 않았고, 두 번째의 진주냉면은 실망이었다. 백반기행 촬영 때는 새벽시장의 김밥 한 줄이 전부였다. 공간의 인연과 달리, 음식과는 연이 닿지는 않는다라고 생각할 즈음에 아들이 군대를 갔다. 경남 함안으로. 하늘이 맺어준 혈연인 아들 면회를 위해 함안을 찾기 시작했고, 그 길에 있던 진주를 다시 만났다. 아들이 다시 이어준 인연이다. 50년 간 3번 스쳐간 진주를 일 년 동안 세 번 머물렀다. 그리고 이 녀석을 만났다. 젠틀한 막걸리, 진주 쇠미골 생막걸리다.

쇠미골 생막걸리

알코올 : 6도

원재료 : 정제수, 쌀, 입국, 종국, 이소말토올리고당, 곡자, 아스파탐, 젖산, 정제 효소, 효모

첫 잔

잔잔한 산미가 첫인상을 남긴다. 단맛보다 산미를 앞세운 막걸리는 역시 좋다. 탄산과 산미, 누룩향이 조화롭다. 단맛은 살짝 배경에 머무른다. 각각의 맛의 어울림이 좋아 술맛이 균형을 잡고 있다. 어느 한 맛이 툭 튀고 나오지 않고, 술맛도 자극적이지 않다. 평양냉면을 육수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슴슴함’이 이 녀석에게도 어울린다. 막걸리가 슴슴하다.

둘째 잔

맑은 맛에 산미를 기본으로 잡은 막걸리다. 산미도 슴슴하고, 단맛과 쓴맛도 슴슴하게 넘어간다. 누룩의 쿰쿰함이 산미와 살짝 엉켜있는 향취가 영덕의 정 막걸리와 비슷하다. 근데 점잖은 느낌이 있다. 경상도 선비 같은. 탄산이 나대지 않고 산미를 자잘하게 입안에서 튀겨준다. 아주 가볍게. 슴슴한 산미의 이 녀석은 좋은 안주와 관계를 맺기 참 괜찮은 막걸리다.

진주는 음식이 맛있다. 경상도 음식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 짜고-맵고-자극적인 맛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다. 냉면이 가장 대표적인 진주의 맛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의 기준을 떠나서라도 진주냉면은 상당히 자극적인 맛이다. 건 해산물을 베이스로 한 육수도 강성이고, 고명으로 올라가는 육전과 면발도 상당히 센 개성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육수의 온도도 매우 차다. 진주를 대표하는 다른 음식의 특징과 비교했을 때 진주냉면은 별종에 가깝다.

진주냉면. 맛이 제법 강하다

진주의 맛을 가장 쉽게 찾는 방법은 중앙시장에 있다. 시장 주변으로 진주의 주요 맛집들이 포진해 있다. 복국으로 유명한 하동 복집과 육회비빔밥으로 전국구의 명성을 얻고 있는 제일식당이 중앙시장 안에 이웃사촌으로 어울려 있다. 또 다른 육회비빔밥 명가인 천황식당과 천수식당도 중앙시장 부근에서 노포의 지위를 얻었다. 김밥집으로 명명되는 진주식 분식집도 당연히 중앙식당 안에서 성업 중이다. 내가 맛본 이곳 음식들의 일반적 특징은 자극적이지 않으나 강한 개성을 가진 맛이었다.


셋째 잔

맛이 더 부드러워졌다. 술에 젖어 미각이 둔해진 탓도 있겠지만 거슬리는 단맛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막걸리가 거리낌 없이 목젖을 타고 넘어간다. 성분표에 참 많은 첨가물이 적혀있지만 뒷맛에 불쾌함을 남기지 않는다. 잡맛없이 맑은 부드러움을 술 안에 담았다. 첨가물의 잔 맛을 남기지 않는 조주술도 분명한 기술이다. 고수의 음식에서 미원의 들쩍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술이 부쩍 오른다. 이 녀석도 실제 도수는 6도 이상일 듯싶다.

육회비빔밥 노포

진주에는 3대 육회비빔밥 집이 있다. 제일식당, 천황식당, 천수식당. LG의 구본무 전 회장이 좋아했다는 제일식당은 중앙시장 안에서 옛 시장 노포 집의 풍경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육회비빔밥 전문점으로 진화하고 있다. 천황식당은 비빔밥보다 유명해지고 있는 육회와 석쇠 불고기, 선짓국에 고풍스러운 가옥이 멋을 더해 주고 있다.

천수식당의 석쇠불고기와 육회. 아름다운 안주다

나는 진주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천수식당의 육회와 석쇠 불고기를 쇠미골 생막걸리와 함께 했다. 멋진 한 상이 었다. 양념의 매콤한 감칠맛과 씹을수록 뭉근히 배어 나오는 육즙을 품은 육회는 막걸리 안주로는 최상급이었다. 석쇠불고기는 전국구의 맛이었다. 비법 양념으로 살짝 재워 연탄불에 구어 나오는 불고기는 은은한 단맛과 매운맛이 소고기의 감칠맛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야구를 해본 사람은 알 수 있다. 투수가 던진 볼이 배트의 스위트 스폿에 정확히 맞는 순간의 손맛을. 진주 천수식당의 육회와 석쇠불고기가 그렇다. 순한 양념과 불맛이 고기의 감칠맛이라는 스위트 스폿에 딱 들어맞고 있다. 자극적이지 않은 편안한 맛으로 미각에 강한 임팩트를 그린다. 풍성한 감칠맛으로 행복해진 입 안을 시큼슴슴한 쇠미골 막걸리가 적셔 준다. 깔끔하다. 시원하다. 맛있다. 아직 히든카드가 남아있다.

맛의 히든카드. 보기와 완벽히 다르다


천수식당 음식의 히든카드를 뒤집 어 본다. 서비스로 나오는 국이다. 육회비빔밥에 딸려 나오는 자그마한 국 한 그릇이 게임을 체인지할 수 있는 히든카드다. 나물 고명과 어우러지는 육회 비빔밥의 맛은 역시나 좋다. 이 맛에 하나를 더해 셋 이상의 시너지를 서비스 소고기 국이 만들어 내고 있다. 매콤 시원한 소고기 선짓국이 속을 뜨끈히 풀어준다. 건더기로 들어있는 소고기를 천천히 씹어본다. 이럴 수가. 꼭꼭 씹는 어금니 넘어 혀를 적시는 매콤한 감칠맛이 매력적인 자극을 준다. 칼로 잘 다진 다짐육에 질 좋은 매운맛이 흠뻑 스며들어 있다. 스테인리스 밥공기 안의 서비스 국에 정성으로 끓여낸 맛이 따뜻하게 담겨있다. 이 한 그릇을 위해서 난 진주와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

넷째 잔

거칠지 않은 고운 탄산의 지속력이 상당히 좋다. 단맛은 여전히 희미한 흔적만 남기고, 산미가 주도하는 슴슴함이 좋은 술맛을 유지한다. 쇠미골 생막걸리는 주연의 맛은 아니다. 어쩌면 이 녀석은 멋진 안주를 만나 더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드라지는 캐릭터를 구축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매력을 보여준다. 과하지 않지만, 넉넉한 술맛을 남겨준다. 지칠 때 돌아보면 늘 주위에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편한 친구 같은, 좋은 녀석이다.


승발이의 맛 평가 : 전국구가 되기에는 힘든 막걸리지만, 진주의 멋진 음식 파트너라는 것만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는다. 은은하고, 슴슴하여 오래갈 수 있는 막걸리다. 4.2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기회가 되면 자극적이지 않은 진주 음식과 마셔보길 추천한다. 육회도 좋고, 석쇠불고기도 좋다. 하동 복집의 아구 수육과 함께 해도 아주 좋다. 자극적이지 않은 편안한 안주와 함께 해보자. 음악도 편안하게 배리 매닐로우의 ‘Mandy’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