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형님에게 막걸리 한 잔을

제프 벡(Jeff Beck) 형님이 갔다. 무지개 너머로 영원히 가버렸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 더불어 소위 세게 3대 기타리스트 중(국내 4대 짬뽕처럼 누가 선정했는지는 모르는 구전 세계 3대 기타리스트다. 아마 일본 음악 평론가 창작의 산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한 명이자 가장 인기 없는 형이었지만, 나는 제프 벡 형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야 있어 보였다.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신의 손’ 에릭 클랩튼은 너무 말랑말랑하다고, 전설의 레드 제플린 리더였던 지미 페이지는 너무 블루지하다고, 나는 감히 설파했다. 세계 최고는 제프 벡 형님이라고. 록에서 블루스, 재즈를 관통하는 그의 투명하면서도 예리한 기타 선율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늘씬하게 잘빠진 펜더를 연주하는 제프 형의 예리한 모습은 너무도 센티(?)하다고. 면도날 같은(이 표현도 일본 평론가가 만들어 낸 말일 거다) 기타 애드리브는 내 심장을 도려낸다고. 나는 그를 찬양했다. 진실이자 거짓이었다. 솔직히. 소수파가 되어야 세 보일 거 같아서 제프 벡을 선택했다. 남들이 잘 안 듣는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야 튈 것 같았다. 공부도 그냥저냥, 외모도 그냥저냥, 키도 그냥저냥이었던 내가 돋보이는 방법은 소수파라 뽐내는 것뿐이었다. 스스로 소수파가 됨으로써 차별화되고, 있어 보이고 싶었다. 제프 벡 형님 뒤에 숨어서.

등 뒤에 달짝 붙어있다 보니 제프 형의 살내음이 느껴졌다. 일렉트릭 기타에 얹어진 제프 형의 숨결은 간결하고 애절했다. 짓궂고 화려했다. 고독하고 심오했다. 청명하면서도 예리하게 울리는 그의 기타 톤은 아름다웠다. 땀에 젖은 긴 머리를 찰랑이며 연주하는 그는, 기타를 통해 도에 이르려는 구도자의 모습이었다. 멋있었다. 현학적 자기 과시를 위해 선택했던 제프 형에게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를 들으며 내 청춘은 깊어졌다. 이제는 한 잔 올리려 한다. 내가 사랑하는 막걸리를 그에게. 그런데, 어울리는 막걸리 한 잔을 선택하기가 너무 힘들다. 한 잔으로 갈음하기엔 제프 형의 음악 세계가 너무 광활하다.

제프 벡의 초기 명반

첫 잔은 Morning Dew

제프 벡의 초기 명반인 ‘Truth‘에 수록된 블루스 록 넘버다. 로드 스튜어트의 걸쭉한 목소리와 경쟁하듯 나오는 제프 형의 기타는 앙증맞고 귀엽게 시작해서, 사랑스러운 멜로디를 영롱하게 연주한다. 아침 이슬처럼. 밤새 술 먹고 들으면 환상적인 곡이었다. 보컬의 마디와 마디 사이를 리드미컬하게 유영하며, 귀를 유혹한다. 이 곡에는 해남의 삼산 막걸리다. 깊은 산미와 단맛이 맑게 투영된 게미진 맛. 로드 스튜어트의 보컬처럼 강한 음식과 마셔도 어우러짐이 좋은 막걸리. 그 맛이 ’Morning Dew’와 닮아있다. 이 곡을 듣고 제프 벡의 기타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삼산 막걸리를 마신 후 남도 막걸리의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둘째 잔은 Beck’s Bolero

제프 형의 기타 선율은 섬세하고 예리하다. 감수성이라는 사금파리를 먹인 연실이다. 가늘지만 날카로운 연주에 매달린 연은 거친 바람을 타고 하늘로 빠르게 날아오른다. 사이키델릭 하고 헤비 한 화염이 실을 타고 올라 연이 화염에 휩싸인다. 강렬하게 존재를 태우고 한 줌 재로 사라진다. ‘Beck’s Bolero’로는 그래서 영덕의 정 막걸리로 받아 준다. 시큼한 동해 바다의 장쾌함으로 강렬한 열정을 식혀본다. 투박하지만 시큼함이 선명하게 새겨진 영덕의 정막걸리는 동해바다의, 청춘의, 파도를 닮아있다. 하얀 기포로 부서져 사라지는 푸르름은 강렬한 화염의 청춘과 맞닿아 있다. 당신의 볼레로에 바다를 닮은 시큼한 정 막걸리를.

이 형은 정말 멋지다

셋째 잔은 She’s a Woman

기타가 끼를 부린다. 도술도 부린다. 간드러지게 멜로디 라인을 이끌어 가던 기타가 툭하고 말을 건넨다. ’She’s a Woman’이라고. 뭔 소리냐고? 들어보면 안다. 제프 형 특유의 세련된 연주와 기타가 서로 대화를 한다. 물론 모두 그의 연주다. 비틀즈의 원곡을 완벽히 재창조했다. 아주 가볍고, 부드러운 터치로 기분 좋은 기타 연주의 혁명을 완성했다. 벚꽃이 휘날리는 화사한 봄날 아름다운 여인이 내 옆에서 끼를 부린다. 닿을 듯 닿지 않고, 말하려 해도 입이 열리지 않지만 난 환상 속의 그녀와 교감을 하고 있다. ‘She’s a Woman’이다. 끼 부리는 연주에는 끼 막걸리의 원탑, 해창 막걸리다. 산미와 단맛이 주거니 받거니 걸쭉하게 부리는 끼에 입안이 화려해진다. 진하게 스쳐가는 12도의 술맛은 끼의 절정이다. 달다 싶으면 새콤하고, 가볍다 싶으면 쓴맛이 혀를 누른다. 걸쭉함이 보드랍게 목을 적시면, 어느새 가슴은 뜨거워진다.


넷째 잔은 Cause We’ve Ended As Lovers

가슴 절절한 연주곡이다. 기타가 운다. 울고 있다. 소리 내어 꺼이꺼이 울지 않는다. 떠나간 사람을 생각하며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다.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꾹 참는다. 아픈 내 사랑을 눈치챌까 봐서다. 삭이고 또 삭여 보지만, 무너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다. 침묵의 눈물 속에서 목마른 외침을 허공에 뱉는다. 불 꺼진 방, 오래된 전축의 낡은 앰프 불빛만이 방을 비춘다. 빙글빙글 턴테이블을 타고 흐르는 ‘Cause We’ve Ended As Lovers’. 가슴은 녹아내리고, 불끈 쥔 주먹은 하얗게 핏기를 잃어간다. 술로 달래고 또 달래 본다. 달달한 술을 싫다. 깊고 하얀 풍미 안에 시큼함을 숨긴 송명섭 막걸리가 아픈고 쓰린 가슴을 달래기에 적격이다. 담백을 넘어 순수한 막걸리로 아픈 마음을 씻어내고 싶다. 천천히 다가오는 은은한 산미로 추억을 잠재우고 싶다. 맑고 투명하기에 이별의 쓰린 상처를 담담하게 보듬을 수 있는 송명섭 막걸리는, 헤어진 이 순간 떠올리는 막걸리다.

제프 형 내가 송명섭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이유는 나에게 형이 ‘Cause We’ve Ended As Lovers’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섯째 잔은 Sweet Sweet Surrender와 하동의 정감 막걸리를, 여섯째 잔은 Superstition에 너디 펀치, 일곱째 잔은 Get us All in The End에 맞춰 강한 탄산의 복순도가 손막걸리를, 여덟째 잔은 People Get Ready의 진한 감정을 금정산성 막걸리에 실어 보고,  아홉째 잔은 Over the Rainbow을 들으며 씁쓸한 수덕산 생막걸리로 적셔봅니다… 당신의 음악에 맞추어 나는 점점 취해 가네요. 개성 강한 멋진 연주에 합을 맞출 수 있는 좋은 막걸리가 있음이 참 다행입니다. 아마 당신의 친구 로드 스튜어트도 지금 이 노래를 부르며 한 잔 하고 있지 않을까요. I’ve been Drinking.

마셔야 할 땐 마셔야 한다

R.I.P Jeff Be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