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수안보의 생막걸리(수안보 양조장)

“형 수안보에 스키 타러 안 갈래요? “. 본적도 같고, 살고 있는 동네도 같고, 학교도 같은 후배가 1991년 겨울에 던진 말이다. 발에 스케이트도 못 대는 나에게 스키를 타러 가자는 후배의 제안도 뜬금없었지만,  수안보는 오로지 온천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동네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후배의 제안은 마치 “형 절에 성경책 보러 가지 않을래요? “처럼 들렸었다. 녀석의 부모님도, 나의 부모님도 수안보는 신혼여행을 다녀오셨다. 지금 세대에게는 믿기지 않겠지만, 반세기 전 대한민국 신혼부부를 위한 초야의 밤은 대부분 수안보에서 빛났었다. 첩첩산중에 가려진 아득한 산골에 뜨거운 자연용출수가 펑펑 샘솟는 최고의 온천 관광지였고, 신혼여행지였다. 오늘 소개할 막걸리는 신혼부부들의 화사한 생기로 가득했던 과거를 지나 고독한 고느적함이 수증기처럼 짙게 깔려있는  온천의 추억 수안보에서 80여 년을 버텨온 수안보 생막걸리다.

알코올 : 6도

원재료 : 정제수, 쌀, 소맥분, 팽화미, 입국, 올리고당, 정제효소제, 효모, 젖산, 아스파탐, 사카린 나트륨

쌀에 소맥분과 팽화미까지. 게다가 사카린도 있다. 막걸리에 넣을 수 있는 웬만한 건 다 들어가 있는 듯한 재료 구성이다. 유통기한에서 5일이 지났다. 산미가 더해졌을까? 향은 시큼, 쿰쿰하다. 깔끔하진 않지만 정겹다.


첫 잔

맛이 맑다. 그리고 달다. 잔탄산의 기운이 제법이다. 거칠게 다그치지 않고, 곱게 입안을 자극한다. 사카린 막걸리 특유의 씁쓸 달달한 뒷맛이 있지만, 무난하게 넘어간다. 충분히 차게 보관된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향에서 느껴지는 쿰쿰함에 비해, 맛은 맑고 무난하다.

둘째 잔

쌀은 국내산, 소맥분은 호주와 미국산, 팽화미는 어딘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외국산이다. 진정 다국적 재료가 발효된 막걸리다. 혀의 감각을 속이는 ‘찬 기운’이라는 마술이 사라지니 단맛이 슬그머니 강해진다. 차게 마시면 무난히 마실 수 있다. 산미가 있지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단맛과 섞여서, ‘무난함’을 만들고 있다. 이런 종류의 막걸리가 맛 표현이 가장 힘들다. 이유는? 무난하기 때문이다. 쌀, 소맥분, 팽화미를 섞어 술을 빚는 이유는 재료비 절감을 위해서 일수도, 고유의 발효기술 때문 일수도 있다. 확실한 건 뺑뺑 둘러 산 밖에 보이지 않는, 온천이 아니었으면  자연인만 있을 듯한 수안보라는 지역의 특징이다. 쌀농사를 넉넉히 지을 수 없는 산간 지역에서 막걸리를 쌀로만 빚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강원도 영월이나 인제 같은 산간 지방에서 아직도 밀 막걸리가 출시되듯이 수안보 생막걸리에 소맥분이 함유됨은 쌀이 부족한 환경적 요인이 있을 것이다.


척박한 환경과 빈약한 식재료는 특별한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다. 환경에 맞춰 고유의 먹거리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바다도 없고, 비옥한 전답도 부족한 산골 마을에 팔도의 관광객에 뜨끈히 몸을 지지러 몰려든다. 50년 전 수안보는 예상치 못한 수요에 맞춰 지역의 먹거리를 공급했다. 토끼탕이다. 충주시는 멀고 소를 잡자니 농사일이 막막해지는 산골에서 그나마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는 야생동물이다. 수렵이 허용되던 시절, 눈 쌓인 산으로 토끼잡이를 나가던 마을 청년들의 모습은 예전 드라마와 만화의 주요 소재였다. 야생성에는 때때로 몸보신의 망상이 담겨있다. 뜨끈히 온천수에 몸을 지진 관광객이 야생의 생명력을 입에 넣으며 장수의 근거 없는 희망을 씹었을 것이다. 나도 토끼 매운탕을 먹어 봤다. 30여 년 전 방문한 수안보 초입의 국도길엔 토끼탕을 파는 식당이 제법 여러 집 줄지어 있었다. 뻘건 찌개 국물에 담겨있는 토끼 고기의 질감은 퍽퍽했고, 국물과 고기가 완벽히 겉돌고 있었다. 작은 외삼촌의  선택이었던 토끼 매운탕은 외할머니의 급체로 마무리됐다. 관광객이 미식용으로 소비하기에는 어려운 아이템이다. 호불호를 떠나 토끼탕이 수안보 식문화 생태계에 자리 잡은  배경은 이해가 되지만, 머리가 이해하는 것과 혀가 받아들이는 것은 한 몸이지만 별개의 영역이다.

셋째 잔

온천을 하고, 땀을 훅 빼고 한 잔 마시면 어떨까 상상을 해본다. 달달하고 거침없이 잘 들어가리라. 부드럽지는 않다. 잔탄산의 기운도 있고, 입안에 남는 쌉싸래한 뒷맛도 혀뿌리에 선명히 남는다. 맑지만 흐리멍덩한 녀석은 아니다. 다양한 재료를 섞고, 이렇게 맑은 단맛의 막걸리를 뽑아내는 건 경험에서 오는 멋진 주조 기술이다. 특히 소맥분 특유의 들쩍한 단맛이 없음은 멋진 미덕이다. 수안보에서 살아가는 산골 원주민에게도, 수안보를 찾았던 영광의 온천시절 관광객에게도 부담 없이 받아들여졌을 무난한 맛이다.


1991년에 후배가 함께 가자던 스키장은 수안보의 대표적인 흉물이 되어있다. 온난화 때문에 예전만큼 오지 않는 눈의 영향도 있지만, 수안보 온천의 쇠락으로 오지 않는 사람 때문에 스키장은 망했을 것이다. 스키장뿐이 아니다. 충주 촬영차 들러본 수안보의 풍경은 고독했다. 수안보로 신혼여행을 왔던 부부들은 황혼기에 접어든 회색빛 과거가 되었다. 스키도 타고 온천도 하자던 1991년의 대학생은 중년의 정점에서 초로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뜨거운 자연용출 온천수의 열기가 식어버린 사람들의 자취를 만나 뿌연 안개를 드리운다. 화려했던 과거가 없었다면 지금의 수안보는 보석같이 찬란한 온천수가 샘솟는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고장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영광이 현재의 발목을 붙잡고, 미래의 시야는 흐릿하다.

80년 전통의 수안보 생막걸리의 무난한 맛도 고장을 닮아있다. 모두에게 무리 없이 봉사했던 그 맛이, 붐비었던 시간을 지나 지금은 그저 그런 술로 보일까 봐 두렵다. 막걸리 맛은 변함이 없지만, 세상이 변했으니까. 꿋꿋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막걸리이고, 술맛이지만. 그 하나만으로 버티기에는 수안보의 원주민의 수도, 관광객의 수도 예전 같지가 않다. 멋진 양조기술로 보다 과감한 막걸리를 뽑아내면 어떨까. 달던 시던 쓰던 예전부터 그러했으니 지금도 그러하다고 2023년을 살아가기엔 너무 그러하다. 지나옴으로만 현재를 설득하기에는 자본주의라는 세상이 지나치게 냉정하다.


승발이의 맛 평가 : 80년이라는 세월이 보다 과감하게 술에 녹아들었으면. 전국구로 발돋움하기엔 너무 무난하고 평범하고, 지역에서만 버티기에는 수안보가 과거와 다르다. 3.5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생선이 귀한 충주식 고등어 요리는 생각 외로 맛있다. 자반고등어를 쪄서 익힌다. 증기로 푹 쪄 짠기와 비린맛이 적당히 빠져나간 고등어에 조선간장과 참기름, 다진 마늘과 파, 깨를 섞은 양념장을 올려준다. 양념에 적신 고등어 뱃살 한 점을 씹으면 촉촉하고 따스한 고소함이 짭조름하게 입 안을 감싼다. 기. 가. 막. 히. 다. 수안보 생막걸리 한 사발 걸치면 고등어의 비릿한 감칠맛이 기분 좋게 어울렸다가 깔끔하게 사라질 것이다. 충주의 수영식당의 고등어 양념구이가 유사한 맛을 낸다. 양념 올린 고등어를 은박지로 감싸 찜구이로 조리한다.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는 고등어, 막걸리에 더해지는 고급스러운 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