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한잔

이름이 예쁘면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긴다. 강릉 한잔이 딱 그런 막걸리다. 이름이 멋지다.  관습처럼 들어가는 '생막걸리'를 과감히 던져버린 용기 있는 작명에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이름값을 하는지 가격이 만만치 않다. 750ml에 9,000원. 직관적인 기대감을 같게 만드는 장점이 이름값에는 있다. 반면 이름값이라는 기대감은 종종 배신감이라는 부작용을 크게 가져오기도 한다. 경험치로 쌓인 이름값이 아니라, 작명술에 의한 이름값이 가질 수밖에 없는 단점이다. 강릉 한잔이 그렇다.

알코올 : 6도

재료명 : 맵쌀(국내산), 찹쌀(국내산), 누룩, 물

국내산 재료로 첨가제 없이 삼양주로 빚은 정성스러운 술이다. 삼양주는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쌀을 세 번 넣는 술 빚기 방식이다. 처음에는 쌀을 조금, 다음 두 번은 많이 넣어 발효의 안정성과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방식이다. 그만큼 재료비도 많이 들어가고, 정성도 많이 들어간다. 쌀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술의 단맛도 높아지는 특징이 있다. 삼양주는 보통 18도 전후의 알코올 도수가 나오지만 강릉 한잔은 6도이니 물이 제법 첨가가 됐다. 이런 경우 술과 물이 따로 노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만드는 주조장 입장에서는 자금 회전이 멈추는 시간이다. 강릉 한잔은 이 모든 걸 감내하고 출시된 술이다. 이름값에 근거가 있다. 이제 맛만 좋으면 된다. 마셔보자.

첫 잔

보드랍다. 보드랍고 새콤하다. 신맛이 앞서고 뒤에 단맛이 따라온다. 보드랍고 새콤한 맛이 삼양주의 전통을 고수한 맛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복순도가 손막걸리, 이화백주, 너디 펀치 등 산미를 전면에 내세운 단양주 혹은 이양주 막걸리의 맛과 유사함이 있다. 이들과 크게 다른 것은 탄산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맛이 곱다. 요즘 출시되는 막걸리의 특징이 산미와 탄산감을 전면에 내세워 샤워 맥주(산미가 강한 맥주) 같은 풍미를 준다는 점이다. 아마도 젊은 취향을 사로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강릉 한잔은 맛에서는 트렌디한 막걸리 맛을 담았지만, 탄산감이 없다는 점에선 전통적인 고급 막걸리의 풍미를 닮아있다. 전통과 유행이 함께 있는 막걸리다. 최근의 강릉처럼.

강릉 경포대는 여전히 아름답다. 경포호와 바다를 사이에 둔 해송림은 뜨거운 여름 바다에 시원한 녹음을 선사한다. 그 녹음 밑에서 넋을 빼고 동해의 호쾌한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언제나 좋다. 바다와 모래밭과 해송림 사이사이를 촘촘히, 알록달록하게 물들이는 건 사람이다. 가족 단위도 많고, 예전의 기억을 찾아온 중년도 많지만 특히 많은 사람은 젊은이들이다. 여름 바다야 언제나 젊은이들이 주인공이었지만, 강릉을 찾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주하다. 특히 재래시장을 가면 부쩍 젊어진 강릉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강릉 중앙시장. 전통과 유행이 교류하고 있는 곳

강릉시장 중 가장 큰 규모라는 중앙시장은 핫플이다. 닭강정과 어묵 고로케 상점이 있는 시장 골목은 어깨를 접지 않고는 지나다니기도 어렵다. 웬만한 가게 앞에는 젊은 커플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줄을 서있다.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복장과 밝은 표정,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떠드는 그들의 목소리 덕분에 전통시장이 싱그러운 색을 입고 있다. 지금 강릉은  영화 '강릉'처럼 의리파 건달과 양아치 깡패들의 되도 않는 싸움터가 아니라, 밀려드는 젊은이들로 인해 전통과 유행이 믹스되기 시작한 화사한 물감의 팔레트 같다.

둘째 잔

새콤한 산미가 여전하다. 천천히 마셔보니 산미 뒤에 숨은 단맛이 의외로 강하다. 논리적으로 ‘강릉 한잔’은 단맛이 강할 수밖에 없는 술이다. 삼양주로 빚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 양조용 포도가 쌀보다 더 달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원재료에 포함된 ‘당’의 양만큼 알코올 도수가 정해지는데 와인의 도수는 높아도 16도를 넘지 못하지만, 쌀로 빚은 삼양주는 18도를 쉽게 넘는다. 쌀이 숨기고 있는 단맛은 의외로 강하고 그런 쌀을 세 번이나 넣는 삼양주의 단맛은 당연히 높다. 강릉 한잔은 삼양주로 빚은 술이다. 물을 섞었지만 그렇다고 단맛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못한다. 다만 강한 산미 뒤에 탄산 없이 얌전하기 숨어있을 뿐이다. 산미도 세고 숨은 단맛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강릉 한잔’은 회나 해산물 등 옅은 맛의 안주와 어울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강릉과 딱이다.

몇 년 전 백반기행 강릉 편을 준비할 때 가장 힘들 없던 점이 해산물 맛집을 찾는 거였다. 작가들이 아무리 조사를 해도 뾰족한 해산물 집이 발견되지 않았다. 찾고 찾아 한 집을 섭외했지만 넓은 동해 바다를 곁에 두고 있는 강릉 답지는 않았다. 오히려 육류를 기반으로 한 맛집들이 더 많았다. 갈매기 구이의 콜롬보 식당이나 소머리국밥의 철뚝집, 장칼국수로 유명한 벌집 등이 그렇다. 얼마 전 강릉에서 친구를 만났다. 속초가 고향이고 주말에만 강릉에서 주말부부로 지내는 축복받은 녀석이다.

“화영아, 나 강릉이다. 시간 되면 저녁 같이 먹자. 회 한 접시 어때”. “오~ 강릉이야. 저녁 좋지. 근데 나 횟집 어디가 좋은지 몰라”. "뭐라고? 너 강릉 살잖아"

친구의 말은 그랬다. 강릉은 바다는 있지만 예전부터 항구가 발달하지 못해서 해산물이 좋은 고장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논과 밭이 좋은 곡창지대였고, 그래서 장 칼국수나 소머리국밥집이 더 많고, 해산물도 원물 형태가 살아있는 메뉴보다 가공된 것들이 발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릉 중앙시장을 가면 유난히 건어물 상회가 많이 있고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소머리국밥 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젊은이들이 가장 붐비는 곳에는 배니 닭강정을 필두로 어묵 고로케, 오징어순대 등이 포진을 하고 있다. 전통과 유행이 어우러진 강릉 중앙시장 먹거리 구성에 해산물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강릉 한잔은 지금의 강릉과 어울리는 막걸리다.

강릉 한잔의 산미 있는 보드라움은 기름진 음식과 마시기에 좋은 풍미이다. 닭강정도 좋고, 어묵 고로케도 괜찮다. 소머리 수육과 함께 해도 좋다. 강릉 한잔의 산미가 기름진 맛을 씻어주고, 삼양주의 단맛이 시장 메뉴의 짠맛과 어울려 단짠단짠 한 매력을 준다. 풍부한 탄산의 시원한 청량감은 없지만, 그런 역할은 맥주에게 양보해도 된다. 강릉 한잔의 역할을 따로 있다. 닭강정 한 박스 들고, 강릉 한잔 한 병 들고 경포대 해송림으로 가자. 저녁이 되어 달빛이 내린다. 정철 선생이 관동별곡에서 노래하셨다. 이곳에선 달이 다섯 개라고. 하늘에 달, 바다에 비친 달, 호수에 비친 달, 그대 눈동자에 어린 달, 그리고 술잔에 담긴 달. 달이 담길 술잔에 탄산이 통통 튀어대는 맥주는 방정맞다. 들쩍 씁쓰름한 희석식 소주는 너무 뻔하다. 보드라운 질감을 가진 강릉 한잔을 담아보자. 다섯 번째 달이 곱게 당신의 술잔에 담긴다. 부드럽게 강릉 한잔을 입 안에 넣어본다. 달이 넘어온다. 강릉이 넘어온다.

강릉 경포대


TIP

1) 강릉이 그래도 바닷가인데 해산물을 빼먹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 항구마차를 추천한다. 동해바다를 끼고 있는 풍광이 멋진 집이다. 문어숙회와 가자미 회무침이 먹을만하다. 사람이 늘 넘치고, 일찍 문을 닫는 게 아쉽지만 괜찮은 해산물 포차다 https://naver.me/x3qV0vxV

2) 강릉 한잔 자매품으로 강릉 전통 생막걸리(8도), 경포대의 뜨는 달(13도)이 있다. 술꾼이라면 비교 시음도 재미난 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