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육개장과 337 백곡 생막걸리

"엄마, 올 추석에는 차례 음식 만들지 마세요. 그냥 가족들 모여 식사만 해요"

"얘, 그래도 떡이라도 좀 하고 탕국이라도 끓여야지 않을까"

"아휴 송편 누가 먹는다고. 하지 마세요"

장손이랍시고 작년에 다시는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공식적인 명분은 쌀 몇 말을 방앗간에서 쪄오지만 몇 알 먹지도 않고 냉동실에서 동면에 들어가는 송편이 꼴 보기 싫어서였다. 차례상에 올릴 만큼만 사 오자니 정 없이 박하다며, 추석날 찾아오는 친척들 양손 가득히 송편이라도 바리바리 싸서 보내야지 않냐는 엄마의 큰 손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겨울잠만 내쳐 자다가 냉동실의 구박 덩어리로 전락하는 송편은 비효율의 상징처럼 보였다. 명분은 있지만 실속은 없고, 하긴 해야 하지만 환영받지는 못하는 음식. 18년 전에 추석 특집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생방송에 송편 편을 연출한 적이 있었다. 추석 전날 방송이어서 타이밍 상 시청률이 제법 나오리라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역사상 최악의 시청률이 나왔으니 말이다. 주부들을 상대로 한 프로그램 아이템을 주부들이 철저히 외면한 결과이리라. 생각해 보니 명절 음식 하는 것도 지긋지긋한 판에 송편이 어쩌고 저쩌고를 추석 전날 아침부터 떠들고 있으니 전국의 주부님들이 짜증이 났을 터이다. 주부 시청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매섭도록 현실적이다.

추석 달은 구름에 가려도 밝다

송편을 언제부터 빚기 시작했고, 언제부터 추석 차례상에 올랐는지는 명확지 않다. 문헌(동국세시기)상으로는 오히려 초봄에 먹던 음식이었다. 정월 보름날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장대에 곡식을 매달아 두었다가 중화절(음력 2월 1일)에 특별히 ‘삭일송편’, ‘노비송편’이라 하여 송편을 커다랗게 빚어 노비들에게 나이 수대로 주었다고 한다. 노비들 떡 먹고 힘내서 열심히 일하라는 뜻인 셈이다. 이런 송편을 추석에는 햅쌀로 빚으니 '오려송편(올벼송편)'이라고 불렀고, 한 해 수확을 잘 마침에 감사하는 의미로 가을 차례상에 올렸다고 한다. 애초에 송편이 추석에만 특화된 음식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흘러 추석 절기음식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1786~1855)가 썼다고 알려진 [농가월령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음력 8월엔) 신도주(햅쌀로 만든 술) 올여송편(햅쌀 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

추석에는 송편만 먹은 게 아니다. 술도 마셨다. 제주(祭酒)는 오히려 떡보다 귀중한 음식이었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햅쌀로 빚은 술을 '백주(白酒)' 또는 '신도주(新稻酒)'라고 하며  정성껏 빚었다고 한다. 폭염 속에 치러진 이번 추석은 제외하더라도, 햅쌀을 수확하고 차례를 지낼 때까지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넉넉지 않았기에 신도주는 이양주로 담갔다. 조선시대 전통주 레시피 책인 [양주방]에는 "(신도주는) 햅쌀로 무리떡(백설기)을 쪄서 햇누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버무려 밑술을 담고 사흘 만에 햅쌀로 고두밥을 만들어 물과 함께 밑술에 넣었다가 열흘 뒤에 맑거든 따라서 먹으면 맛이 맵고도 달다"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밀가루를 넣는 이유는 맛을 위해서가 아니다. 밀가루에 있는 효소 성분이 당화를 촉진시켜 빨리 술이 되라는 의미다. 단양주처럼 급격한 속성주는 아니더라도, 햅쌀로 맛을 빨리 뽑기 위한 레시피로 빚은 술이 추석용 제주인 '신도주'이다. 신도주가 탁주인지, 막걸리인지, 청주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맛나게 익은 술을 맑게 떠서 마셨으면 동동주였을 것이고, 앙금까지 섞었으면 탁주였으며, 물을 섞어 양을 늘렸으면 막걸리였을 것이다. 다만 '백주(白酒)'라고도 일컬어졌다고 하니 맑은 술을 떠서 차례상에 올리지 않았을까 예측을 해본다. 이런 예측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백화수복'이다. 부동의 제주(祭酒) 판매 1위 백화수복은 '정종' 혹은 '청주'라 불리며 차례상 1열에 당당히 자리 잡는다. 추석엔 송편처럼 확고히 자리를 잡은 일종의 차례상 형식이다. 술에 국경이 어디 있겠냐 만은 그래도 아쉬움이 있는 풍경이 차례상의 정종이다.

일본 사케

한국에선 청주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정종'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술 사케의 브랜드 명이기 때문이다. 일본 효고현의 한 양조장이 사케를 출시하면서 불교 경전에서 임제정종(臨濟正宗)이라는 문구를 보고 '정종(正宗)'이라 명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케가 워낙 유명세를 타면서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에도 알려졌고, 이후 일본식 맑은 술을 통칭하여 정종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정종이라는 단어 자체를 많이 모르니 다행이긴 하지만, 정종의 올바른 명칭인 '청주'도 일본 프레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주세법에 따르면 청주는 일본식 입국으로 발효시킨 맑은 술을 의미한다. 만약 발효제로 누룩이 1%라도 사용이 되면 '청주'가 아니라 '약주'로 분류가 된다. 즉, 한국 고유의 발효제인 누룩을 사용하면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맑은 술을 뽑아도 청주를 청주라 부를 수가 없는 슬픈 현실이다. 한국 전통주가 차례상 앞에서는 서자가 되어버린 꼴이다. 그 꼴이 보기 싫어 이번 추석에는 막걸리를 준비했다. 예로부터 추석에는 햅쌀로 담근 '백주'를 준비했다고 하니 막걸리만큼 '하얀 술'도 없을 터. 완벽한 준비이자, 막걸리를 살 수 있는 완벽한 핑계이다. 그래서 차례도 안 지내면서 지역 막걸리 한 통을 사 왔다. 시골집이 있는 진척 백곡면 잣나무골 술도가의 '337 백곡 생막걸리'다. 무려 1,700ml 대용량이다. 추석 명절에는 넉넉해야 된다.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대로, 어떠한 차례 음식도 엄마는 준비하지 않으셨다. 대신 가족이 모이는 추석이라는 날을 위해 엄마표 반찬을 준비하셨다. 불고기, 장조림, 물김치, 육회, 조기조림, 그리고 육개장. "힘들게 뭘 이렇게 많이 했어요?" 나의 빈말에 엄마는 환한 미소로 답하신다. "그래도 뭔가 해야지. 가족이 모이잖니". 맞다. 이제 추석은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그 자체가 특별한 날이 된 시대다. 특별한 날을 즐기는 방법은 역시 음식이 가장 보편적이고, 제일 효과적이다. 과거의 송편이 그랬듯이, 이번 추석에는 엄마표 육개장이 그렇다.

탕국 대신 올려진 육개장이 낯설긴 해도 엄마표 육개장은 특급이다. 직접 담근 고추장에 고운 고춧가루를 섞어 양념장을 준비하고, 진천 읍내 초평 정육점에서 구입한 양지머리와 동네 이 씨 아저씨의 토종닭 달걀과 대파만 있으면 준비 끝이다. 밤새 약한 불로 양지머리 고기를 익혀 육수를 뽑고 여기에 준비한 양념장과 대파를 넣어 팔팔 끓이다가, 손으로 잘게 찢은 양지살과 달걀을 풀면 끝. 정말 완벽한 맛의 육개장이 탄생한다. 고사리나 토란대는 넣지 않는다. 고사리와 토란대의 공통점은 고기와 닮은 갈색이라는 점이다. 부족한 고기의 양을 대신 채우기 위해서 생각해 낸 생활형 아이디어일 것이다. 소고기, 대파, 달걀만으로 충분하다. 그게 육개장이다. 빨간 국물의 얼큰함에 대파의 단맛이 배어 있다. 양지살의 구수함에 달걀의 보드라움이 포개져 있다. 밤새 뽑은 육수에는 감칠맛이 넘실댄다. 액세서리 장신구 하나 없이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 만으로 완벽한 멋을 뽐내는 미인을 닮은 맛이다. 흰쌀밥이 담긴 육개장의 빨간 국물은 시각적으로도 완벽하다. 매콤한 국물에 젖은 하얀 쌀밥의 단맛이 더 도드라진다. 육개장의 뜨끈한 국물 한 수저로 추석 탕국과 차례 음식의 아쉬움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한국인 입맛 최강의 조합인 쌀밥에 고깃국

육개장으로 얼큰해진 입을 337 백곡 생막걸리로 달랜다. 맛보다 1700ml 대용량에 담긴 막걸리의 넉넉함에 먼저 마음을 뺏긴다. 도저히 한 손으로 따를 수 없는 무게감 덕분에 공손히 두 손으로 잔을 채운다. 소박한 달큼함이 막걸리 맛에 가득하다. 시골에 가면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대용량 막걸리들이 많다. 농촌 생활 밀착형 막걸리들이다. 소설가 김훈이 산문집 [허송세월]에서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막걸리는 술을 밥 쪽으로 끌어당긴다... 막걸리는 밥을 술처럼 먹게 하고 술을 밥처럼 먹게 한다"라고 했듯이, 시골에서 막걸리는 일종의 생필품이다. 그래서 대용량이 잘 팔린다. 곁에 두고 쉽게 마시려니 750ml는 빈약하다. 쉽게 빈 통을 보이지만 근처에 살 곳도 마땅치 않고, 사러 가기에도 귀찮다. 오며 가며 벗 삼아 마시는 막걸리는 넉넉한 1700ml 대용량이 마땅하다. 시골의 대용량 막걸리는 크지만 부담되지 않는다. 싼 가격에 둥글둥글하고 소탈한 단맛 덕분이다. 안주는 소박한 것이 좋다. 장조림 하나 있으니 단짠단짠 하니 술맛이 꿀맛이 된다. 추석 보름달 아래 오랜만에 모인 친척과 가족들이 부담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기에 좋다. 배가 불러 많이도 못 마시고 독하지도 않으니 술에 취해 주정부릴 일도 없다. 이래저래 추석에는 대용량 시골 막걸리가 어울린다.

내년에도 추석 차례를 지낼 계획은 없다. 송편도, 탕국도 없이 새빨간 육개장이 놓인 밥상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순간이었다. 맛이 없었다면 문제였겠지만, 엄마의 육개장은 완벽했고 모두가 만족했다. 백화수복 대신 모두가 부담 없이 한 잔 할 수 있는 337 백곡 생막걸리의 넉넉함도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밝은 달도 있었다. 심지어 337 막걸리는 복 3 자 럭키 7을 뜻한다고 한다. 그럼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