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맛과 술 2 - 닭무침과 농태기 소주

20여 년 전 평양냉면에 심취해서 장안에 있는 냉면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찬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할 무렵 을지로 백병원 삼거리에 있는 초계탕으로 유명한 평양냉면집을 찾았었죠. 달달하게 절인 얼갈이김치를 물냉면에 얹어주는 맛있는 집이었죠. 자리를 잡고 주문을 기다리는데 테이블 건너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님 세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척 봐도 내공 깊은 단골분들 같더군요.

“임자, 냉면은 좀 있다 주고 소주 한 병 더 가져와 봐. 이것도 한 사라 더 줘보고”

“취하세요. 그만 드세요. 그리고 벌써 세 번째예요”. “맛난 걸 어떻게. 허허”

‘뭘 더 달라는 걸까’라고 생각하는데 기본 반찬이 내 앞에도 깔리더군요. 보통 평양냉면집은 절임무 한 종지 나오면 그만인데 그곳은 뻘건 색 기본찬 하나를 더 깔아주더군요. ‘아하 이거였구나. 역시 연륜 있는 분들!’. 어르신들이 소주 안주로 곁들이고 있던 반찬은 빨간 닭무침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 냉면집의 닭무침은 기본 반찬으로 무료였거든요. 더 달랄 수도 있고요. 어르신들이 진정한 선주후면을 실천하기 위해 아주 좋은 동반자였죠. 맛이 어떻냐고요? 공짜라고 만만히 볼 맛이 아니죠. 육수 빼고 난 닭을 잘게 찢어서 참기름 치고 고춧가루와 겨자, 설탕 등 갖은양념에 무칩니다. 오이와 무절임도 같이요. 맛도 자극적이지 않고 소주 한 잔 하기에 딱 좋은 맛이죠. 그래서 이 냉면집에 가면 낮에도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공짜 닭무침 반찬에 한 잔을 곁들이며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는 풍경을 언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마무리는 평양냉면이고요.

닭무침. 국빈관 사장님이 정성껏 만들어 주셨다

한국 음식점에서 닭무침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는 않죠. 닭곰탕 전문집에서 닭무침을 파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 경우도 처음에는 닭껍질 무침에서 시작한 것이 닭무침으로 발전한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평냉집의 닭무침이나 닭곰탕집의 닭껍질무침이나 공통점은 식재료의 재탄생이거든요. 냉면집의 닭무침이 육수 뺀 닭을 이용했듯이, 닭곰탕집의 닭껍질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닭곰탕에 들어가는 닭은 살만 들어가거든요. 삼계탕 닭도 다들 옷을 벗고 있잖아요.

을지로 백병원 삼거리 평양냉면집은 닭무침을 반찬으로 내지만 닭무침을 정식으로 메뉴에 넣는 집들도 있습니다. 역시나 그 집들도 모두 평양냉면집이죠. 남대문시장의 맹주 부원면옥이 닭무침으로 유명하고, 송추의 평양면옥도 닭무침으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집이고요. 맛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공유하는 특징도 있습니다. 겨자죠. 빨간 양념 옷을 입고 있지만, 고춧가루는 거들뿐 매운맛은 겨자가 리드합니다. 식초가 앙상블을 더하고요. 꼭꼭 씹어서 닭고기 안에 숨은 육즙을 뽑아내면 양념맛과 어우러진 감칠맛이 참 좋습니다. 입술만 빨갛게 강조한 수수한 자연 미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맛이라고 할까요.

닭무침을 안주 삼아 소주를 드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각인되서일까요. 닭무침에 어울리는 막걸리가 영 떠오르지가 않네요. 그래서 특별히 북한 소주를 준비해 봤습니다. 북한 음식 특집이기도 하니까요. 정확히는 북한 새터민이 북한식으로 남한에서 만든 술이라고 해야겠네요. 40도의 태좌주와 25도의 농태기입니다.

먼저 농태기부터 한 잔 해봅니다.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을 정성껏 증류한 소주라고 합니다. 쌀이 귀한 북한에서 몰래 내려서 먹던 소주의 맛이라고 합니다.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나쁘지 않네요. 전통주를 공부하신 분들과 미식모임에서 농태기를 함께 시음한 적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평들이 좋았습니다. 특히 증류주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농태기에  대한 평가가 좋더군요. “아주 괜찮은데요. 증류식 소주인데도 감칠맛이 있어요”. 맞습니다. 농태기에는 묘한 감칠맛이 있습니다. 희석식 소주처럼 달달한 자극은 없지만 덤덤하고 구수한 맛 속에 분명 감칠맛이 있습니다. 이 정체를 미식모임에 참석하신 분께서 밝혀주셨습니다. “뒷면 성분표에 효모추출분말이라고 쓰여있잖아요. 그게 조미료예요. 우리가 아는 MSG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돼요. 따지고 보면 미원이나 다시다도 다 효모추출분말이거든요. 하하하”. 역시 맛의 비법은 조미료에 있는 건가요. 일반적으로 증류식 소주에는 첨가물을 넣지 않습니다. 자존심 같은 거거든요. 하지만 농태기는 자존심을 버리고 실용을 택한 걸까요. ‘효모추출분말’이라는 조미료를 넣네요.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증류식 소주 맛을 뽑기는 했습니다.

다음은 태좌주입니다. 태좌주는 40도의 과하주네요. 고추씨앗도 들어갔고요. 함경북도 회령 지역 가문의 내림주를 재연했다고 합니다. 아, 우선 과하주에 대한 설명부터 드려야겠네요. 과하주는 발효주에 증류주를 섞은 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맥주에 소주를 섞는 폭탄주는 아니고요. 탁주를 발효시키는 중간에 증류식 소주를 넣어 보관성을 증대시키는 술입니다. 40도 이상의 소주를 넣어줌으로써 탁주(막걸리) 발효 효모가 사멸해서 알코올 발효가 멈추게 되거든요. 그래서 발효 초기에 넣어주면 단맛이 강한 과하주가 되고, 발효 후기에 넣어주면 도수가 높고 술맛이 강한 과하주가 됩니다. 포르투갈의 포트와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만든 술입니다. 와인 발효 중간에 도수가 40도 이상인 브랜디를 넣어줌으로써 발효를 멈추게 하고 저장성과 단맛이 강한 포트와인을 만들게 되는 거죠. 이러한 술 제조법을 주정강화 방식이라고 하고 포르투갈의 포트와 마데이라, 스페인의 셰리주, 이탈리아의 마르살라 그리고 한국의 과하주가 대표적인 주정강화 술입니다. 참고로 이 중에서 과하주가 문헌상 가장 오래된 방식입니다. 최초의 주정강화 술이라는 의미죠. 하지만 태좌주는 정통 과하주라고 하기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도수가 40도로 너무 높습니다. 보통 알코올 도수 10도 정도의 탁주에 증류주를 4:1 정도의 비율로 섞기 때문에 과하주 도수는 20도 전후가 나옵니다. 그런데 태좌주는 알코올 도수가 무려 40도이니 증류주에 탁주를 섞었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막걸리보다 소주를 훨씬 선호했던 북한 지역의 술 문화가 과하주에도 녹아있다고 볼 수 있겠죠. 제법 달달한 맛에 강한 술맛이 더해집니다. 맵싸함도 있고요. 얼핏 한산 소곡주의 맛도 지나갑니다. 앉은뱅이 술로 유명한 한산 소곡주에도 고추씨앗이 들어가거든요.

닭무침하고 마시기에는 농태기가 더 좋습니다. 태좌주는 맛이 강해서 닭무침이 묻히는 기분이 들어요. 립스틱만 바르고 온 순수한 시골처녀가 어우러지기에는 너무 조명이 강한 파티장 같다고나 할까요. 농태기는 제법 어울림이 좋습니다. 화학조미료 첨가물을 효모추출분말이라고 표현한 것도 귀엽고요. 화려하지 않은 구수한 감칠맛의 농태기 소주 맛이 자극적이지 않은 닭무침과 괜찮습니다. 수수하게 꾸민 중년 남녀가 오붓하게 술과 안주를 즐기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북녘의 고기 요리에는 유난히 무침 방식이 많습니다. 닭무침뿐만 아니라 송추의 평양면옥에는 제육무침도 유명하고요, 일산 동무밥상에는 소고기 초무침이 있습니다. 대전 사리원면옥은 소고기김치비빔이 명물이지요. 북한에서 이렇게 고기 무침요리가 발달한 것은 생활환경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추위와 보관성이죠. 기름으로 볶거나 불로 구운 고기는 추위에 쉽게 식어 기름이 굳어 버리기 때문에 바로 먹지 않으면 맛이 현저히 떨어지죠. 대신 삶거나 찐 고기를 양념에 무치면 기름기가 충분히 빠져 맛과 보관성이 볶음 요리보다 길어질 수 있습니다. 대신 요리 방식에 정성과 시간이 좀 더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지만, 맛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겠죠. 그래서 일까요. 술도 제조 시간과 공정이 더 많이 필요로 한 증류식 소주를 북한은 더 좋아하네요. 이 역시도 추위 때문일 겁니다. 도수가 높아 쉽게 얼지 않아 음용성이 좋고, 체온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으니까요. 세상사 다 이유가 있는 건가 봅니다. 그렇다고 닭무침이 막걸리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막걸리와 딱이죠. 대신 저도수 막걸리보다는 고도수 막걸리를 선택해 보세요. 급하게 벌컥벌컥 보다는 천천히 음미하듯 마실 수 있는 막걸리로요. 봇뜰 탁주도 좋고 마깨주도 좋겠네요. 생각보다 닭무침은 시간과 공력이 필요로 한 음식입니다. 닭 삶아야죠, 식혀야죠, 결대로 찢어야죠, 양념에 무침까지. 쉽게 후루룩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고도수에 밀도감이 있는 막걸리를 추천드리는 거죠. 여유 있게, 천천히, 공짜 닭무침 한 종지를 두고 도란도란 소주를 나누시던 냉면집의 어르신들처럼 말입니다.

아! 어르신들이 공짜로 닭무침을 드시던 그 평양냉면집 상호가 뭐냐고요? 평래옥입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무료 추가가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