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배금도가 포도막걸리(김천, 배금도가)

새해 복 많이 마십시다

2023년. 연초부터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 어색한 일이다. 한 해를 관통하는 거대한 포부와 희망찬 계획을 세워야 마땅하다. 새해이기 때문에 막걸리도 특별한 녀석을 선택한다. 올 한 해는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특별한 술에, 근거 박약하지만 꼭 품어보고 싶은 욕심을 찰랑찰랑 담아본다. 복 많이 받으라고. 건강하자고. 벌컥벌컥. 꿈으로 가득 찬 설레는 내일이여 어서 오라. 근데. 사는 게 늘 그렇듯. 예상과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신년을 핑계대어 마셔본 이 녀석이 과거를 끄집어 올라온다. 잊고 있었던 향수를 불러온다. 포도의 짙은 향과 맛이 외할머니를 품고 있다. 배금도가 포도막걸리다.

알코올 : 12도

원재료 : 찹쌀, 포도, 누룩, 정제수

향에서 포도가 물씬 묻어 나온다. 막걸리에서  이런 향은 처음이다. 화학합성물을 인위적으로 가미한 향이 아니다.

생막걸리다

첫 잔

코를 스치는 향에서 낯섦과 낯익음이 공존한다. 막걸리에서 이런 향을 맡을 수 있는 낯섦이 신기하다. 그런데 이 낯익음은 무엇인지 의아하다. 조심스레 한 모금 마셔본다. 아하. 외할머니다. 외할머니의 포도주다. 외할머니가 포도와 설탕을 부어 땅에 묻어두었던, 투박한 포도주의 정취가 담겨있다. 시큼 달큼함에 어리둥절할 즈음에 막걸리의 감칠맛과 산미가 혀 끝에 남는다. 12도의 쓴맛도 좋다. 포도의 당도 덕분인지 단맛이 충분하다. 포도와 막걸리의 산미가 단맛을 덮어서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안주가 적극적으로 필요하지는 않다. 부담 없는 한잔의 가벼움이 포도의 단맛에 스며들어 있다.

외가댁은 적산가옥이였다. 지금이야 상식이지만 수십 년 전에는 드물었던, 수세식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집. 낡은 축음기에서 빙글빙글 올드팝이 회전하던 다다미 방. 알 굵은 소나기도, 타오르는 붉은 노을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었던 짙은 밤색 나무 마루까지. 충주 외가댁의 여름은 꽤나 평온하고 낭만적이었다. 넓은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던 늦여름이었다. 차양 그늘 아래에 설탕을 쏟아붓던 외할머니가 보였다. “외할머니 뭐 하세요?”

까탈스러운 미식가셨던 외할아버지를 위해 마당에 파묻혀있는 항아리는 볕을 볼 기회가 없었다. 겨울에는 김치를 품고 땅에 묻혀있어야 했고, 여름에는 포도주를 품고 있어야 했다. 붉은 고무 대야 한 가득 담아 오신 포도를 항아리 절반쯤 쌓아 올리고 백설탕을 포도가 잠기듯이 쏟아붓는다. 너무 많이도 아니고 너무 적게도 아닌 적당히. 설탕의 삼투압으로 인해 배어 나온 포도즙이 흥건히 차오른다. 늦여름의 더위에 포도즙이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발효가 시작되고, 술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울 큰 손주 맛 좀 볼 테야?”

외할머니가 살짝 떠준 국자 위 짙은 보라색이 찹 곱다. 조심스레 한 모금 달짝인다. 포도의 단 향이 코를 간지롭히고, 달디단 새콤함이 입 안에 가득하다. 어라. 희미한 쓴맛이 혀를 스쳐 목구멍으로 꿀떡 넘어간다. “아구야. 울 손주 어쩌냐. 얼굴이 벌거 진다. 벌써 술이 익었나 보네”. 외할머니 참 맛있어요. 너무 맛있는데 쓰기도 해요. 이건 포도주스인가요. 엄마는 왜 자꾸 웃고 있어. 아씨 너무 더운데. 외할머니 몸이 뜨거워지고, 졸려요. 선풍기처럼 안방 천장이 빙빙 돌아요. 왜 이러지. 눈이 감겨요. “헐헐헐 큰 손주 취했나 보다”


둘째 잔

정성스럽게 빚은 술이다. 텁텁하지는 않지만 농후한 질감이 있다. 목 넘김은 맑다. 포도의 처리에 신경과 노력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충주 선희10의 오렌지를 섞은 투박한 질감과는 차이가 크다. 포도씨나 껍질 앙금의 거친 질감 없이 자연스럽다. 탄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부드럽게 넘어가며 진득한 산미가 좋은 단맛과 함께 혀를 자극한다. 찹쌀과 포도 단맛의 블렌딩이 무리 없이 잘 되어있다. 산미는 막걸리가 리드하고, 포도가 받쳐준다. 블렌딩의 성공은 숙성의 힘이리라. 십장생 장수 생막걸리의 10일 유통 마케팅 덕분에, 막걸리에 웬 숙성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막걸리도 숙성이 가능하다. 원주는 12~15도 정도의 높은 도수가 나오기 때문에, 저온에 오래 저장하면 탄산은 약해지는 대신 술이 숨을 쉬며 숙성의 맛을 더해간다. 천방지축 열혈 막걸리가 세월의 맛을 담은 깊고 풍부한 막걸리로 멋들어진 변화가 가능하다. 포도 같은 자연 첨가물이 들어간 경우는 특히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막걸리 입장에서 포도는 이방인이다. 보라색의 낯선 이방인을 쉽게 융화시킬 정도로 막걸리는 개방적이지 않다. 진정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요한다. 천천히, 천천히 숨 쉬며 다가가다 보면 진정한 합에 이를 것이다. 덕분에 빠른 유통에 따른 현금화가 어려워 술값은 비싸지고 술도가의 경영은 어려워지겠지만, 맛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다. 싸고 빠르게 먹겠다고 언제나 10일 유통 십장생 장수 막걸리만 마시던가, 합성착향료로 인위적인 맛과 향을 둘러친 알밤, 잣, 땅콩 등등의 막걸리만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와인용 포도는 무지하게 달다

포도면 와인을 만들지 왜 막걸리에 섞어서 굳이 포도막걸리를 만드냐고 반문할 수 있다. 불행히도 한국의 포도 품종으로는 본원적 의미의 ‘와인’을 만들 수 없다. 당도가 너무 약하다. 스페인 순례자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드넓은 포도밭의 포도나 칠레 산티아고 마이포 밸리의  와이너리의 포도는 모두 작고 달았다. 달아도 너무 달아서 포도를 만진 손가락이 서로 쩍쩍 달라붙을 정도다. 엄청난 당도와 껍질에 있는 자연 효모 덕분에 와인은 즙을 내어 저장만 하면 썩지 않고 자연발효가 가능하다. 맥아, 물, 홉, 효모만으로 만들어야 맥주로 인정하는 독일의 맥주순수령처럼 와인도 포도 이외에 식품 첨가물이 들어가면(산화방지제 등 보존제는 예외) ‘와인’이라 명명하지 않는 건 자연발효가 가능한 이유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포도 품종은 당도가 낮아 즙만 내어 저장을 하면 잡균을 감당 못해 상하고 만다. 외할머니의 ‘적당량’ 설탕 가미는, 썩지 않고 발효력을 높일 수 있는 필연적인 선택이다. 찹쌀, 포도, 누룩, 정제수만 들어간 포도막걸리는 첨가물 없이 순수하게 발효된 최초의 한국형 포도주 혹은 와인일 수 있다.

배금도가는 막걸리 맛집이다. 맛있어서 다 마시고야 사진을 찍었다

셋째 잔

향이 너무 정겹다. 외할머니 포도주와 막걸리를 정겹게 섞어 놓은 술이 향에 응축되어 있다. 400ml로 양이 적다. 12도 도수도 속을 데우며, 술을 빠르게 태운다. 마지막 잔에는 깔려있던 앙금이 딸려와 걸쭉함이 짙어진다. 벌컥벌컥 호쾌하게 마실 수 있는 막걸리는 아니다. 옛 포도주의 정서는 물씬 담겨 있지만, 호탕한 서민의 술잔에 닿아 있지는 않다. 정직하게 담근 술이지만, 막걸리의 본질이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누룩의 향도, 막걸리 발효 특유의 산미도, 감칠맛도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충분한 숙성으로 자연스러운 합에는 이르렀으나, 독창적 맛의 완결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막걸리의 입장에서는. 포도의 장점을 흡수한 막걸리 보다 오히려 시큼해진 할머니 포도주의 기운이 강하다. 어쩌다 한 번이면 모르겠지만, 지속적으로 마실 수 있는 ‘막걸리’일까는 의문이다. 아무튼, 막걸리겠지만, 어쨌든, 포도막걸리다.

눈을 떠보니 오래된 다다미 방의 창문 너머로 여름 해가 지고 있다. 속이 불콰하고 머리가 흐릿하다. 부엌에서는 외할머니와 엄마가 도란도란 수다를 나누며 저녁 준비를 시작한 듯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뭔지 모를 죄스러움에 몰래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다. 항아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독뚜껑을 열어본다. 노오란 햇살이 떨어지는 항아리 안에서 새콤달콤한 보라색 향기가 물씬하다. 익어가는 포도주의 보랏빛 물결 위로 투명한 방울이 곱게 피었다 톡하니 사그라진다. 쪼그려 앉은 소년의 눈이 보랏빛에 젖어든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승발이의 맛 평가 : 집에서 담근 추억의 포도주 향취를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강추한다. 정통 막걸리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겠지만, 굳어진 막걸리 프레임에서 한 발짝 떠나서 맛보면, 제법 괜찮은 술이다. 이런 시도가 모여 명주가 탄생한다고 믿는다. 4.3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안주 없이 마셔도 좋은 녀석이다. 무안주 음주를 지양하는 분들께는 모차렐라 치즈나 리코타 치즈처럼 담백하고 고소한 안주를 추천한다. 막걸리에 웬 치즈냐는 생각도 편견이다. 갇힌 프레임에서는 포도막걸리도 이단이다. 새로운 시도에서 더 좋은 맛이 등장할지니. 반주는 에이프릴 와인의 ‘Just between You and Me’. 록발라드의 새콤달콤함은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