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 마을의 병영설성 생막걸리(강진, 병영 양조장)

강진이다. 트로트 가수 강진 말고, 전라남도 강진. 전남 교통의 요지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뻘과 흙이 비옥해 식재료가 풍부하고, 수도 한양 땅에서 유배 온 사람들 덕분에 자연스러운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던 강진. 사람도 많고, 식재료도 풍족하고, 문화의 폭도 넓으니 결국 뭐가 좋겠는가. 맞다. 음식이다. 음식이 참 맛있는 곳이다. 특히 산해진미가 오밀조밀하게 깔리는 강진 백반은 전국에서도 으뜸이다. 밥상의 풍요로우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당연하다. 막걸리다.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 육군 총지휘부가 있었던, 그래서 물자가 유달리 풍부했던 병영면의 막걸리, 병영설성 생막걸리다.

강진의 병영설성 생막걸리

알코올 : 6도

재료명 : 정제수, 쌀, 누룩, 종국, 효모, 아스파탐


어라, 막걸리에 살얼음이 동동 뜬다. 김치 냉장고에 두었더니 졸지에 살얼음 동동 동동주가 되었다. 술맛이 굳어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첫 잔

술이 살짝 얼어 있어서 그런지, 맛이 평면적이다. 향은 시큼하게 올라오는데 술맛이 밋밋하다. 긍정적 표현으로 투명한 맛이다. 탄산과 앙금의 거친 질감이 전혀 없다. 산미와 단맛도 옅게 깔려서, 마치 살짝 가미가 된 정읍의 송명섭 막걸리를 마신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술을 살짝 식혀봐야겠다. 너무 차서 풍미마저도 얼어 버렸을 수도 있다.

둘째 잔

단맛이 약간 살아났다. 그렇다고 극적으로 부활한 단맛은 아니다. 희미한 정도다. 산미는 여전히 존재감을 찾기 힘들다. 뒤에 남는 감미료의 들쩍함이 약간 느껴지지만,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맑고 투명함과 희미함 사이 어딘가에 이 녀석은 존재한다.

일본의 도예가이자 미식가로 유명한 로산진(만화 ‘맛의 달인’의 미식가 우미하라의 실제 모델)은 ‘최고의 미식은 무미를 느끼는 것이다. 무미, 즉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맛에는 엄청난 매력이 숨어 있다. 무미는 맛 그 자체가 바닥을 모를 정도로 깊고 조화롭다. 나아가 그 배후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므로 진정한 맛이라 할 수 있다’라고 ‘무미’를 찬양한다. 병영설성 막걸리가 그 정도의 무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산미나 감미같이 직관적인 자극이 앞서는 막걸리는 분명 아니다. 혼돈스러운 건, 지금 이 녀석은 무미인 건지, 풍미가 얼어버린 건지 구분이 잘 안 간다는 것이다. 시간 차를 두고 천천히 마셔본다. 막걸리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셋째 잔

산미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역시나 은은하다. 맑고 은은하게 마실 수 있는 막걸리다. 이런 맑은 맛은 밥 대신 마시는 막걸리가 아니라, 안주와 함께하는 술로서 발달한 막걸리라고 생각이 든다. 병영면의 풍부한 먹거리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산미가 살아나 밸러스가 잡히니, 희미함이 사라진다.

하멜 일행 33명이 8년 간 유배생활을 한 병영면은 조선 시대 개성상인과 비견될 정도의 남부 최대의 상단인 병영상인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병영면 하멜로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병영 양조장이다. 붉은 벽돌 굴뚝이 우뚝 솟아있는 양조장 건물을 보면 괜스레 ‘저곳 양조장 막걸리는 맛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불뚝 떠오른다. 붉은 벽돌 굴뚝이 주는 나쁘지 않은 선입견이다. 경험상 이런 종류의 선입견은 대부분 옳은 것으로 판명된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세월의 멋이 주는 선입견이기 때문이다.

병영 양조장을 지나 읍내 안으로 들어가면 하멜보다 유명한 병영면의 명물 거리가 나온다. 돼지불고기 거리다. 설성식당을 필두로 수인관, 배진강 등 이름값 떨치고 있는 많은 연탄구이 돼지구이집들이 가득하다. 질 좋은 돼지고기를 빨갛게 양념해서 연탄에 구웠는데 맛이 없으면 반칙이거나, 정말 더럽게 음식 솜씨가 없는 거다. 병영면 연탄돼지구이는 당연히 맛있지만, 돼지구이만으로 이름값을 얻은 건 아니다. 강진 특유의 푸짐한 백반 한상에 연탄돼지구이를 주연으로 매칭했기 때문이다. 1인 11,000원에 상다리 부러 저라 나오는 한 상을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특히 설성식당은 개량화되지 않은 시골 밥상의 원형이 잘 보존된 한 상이 나와 오히려 외지인에게 더 인기가 좋다. 이렇게 맛깔스럽고 푸짐한 밥상을 보면 병영설성 막걸리의 은은하고 투명한 맛이 납득이 된다. 풍성한 맛을 보듬으며 마실 수 있는, 부담 없고 맑은 맛. 술은 음식과 공존하며 발전한다.

설성식당의 한 상 차림

넷째 잔

병목으로 모아지는 향은 시큼함이 강하지만, 입은 단맛에 젖어있다.  간이 센 안주와 합을 맞추면 투명할 정도로 맑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원주에 가수를 한 후 아스파탐 가미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보다 더 투명한 맛으로 주조의 방향을 잡았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 한 자락이 잡힌다. 이 정도의 맑은 맛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강진에 가면 늘 찾는 곳이 있다. 강진 성전면 삼거리 ‘서울식당’이다. ‘강진에서 왠 서울식당?’이라며 외면받기 딱 좋은 상호지만, 남도 백반의 진수가 서울식당에 있다. 제육볶음, 더덕무침, 오징어무침 등등 14 종류의 반찬에 싱싱한 강진 바지락으로 끓인 시원한 국, 심지어 1인상도 가능하고 굴비도 두 마리나 준다. 단 돈 7000원에(지금은 올라서 8000원). 고급지고, 정갈하지는 않다. 투박하고 정감이 있다. ‘맛깔나다’는 표현이 찰떡처럼 붙는 밥상이 서울식당에 있다. 누구의 작명인지 물어보진 못했지만, ‘서울식당’이라는 상호를 붙인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서울 사람들이 덜 오고, 남도 시골밥상의 원형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남원 추어탕 명가 ‘부산식당’처럼 ‘서울식당’ 사장님도 서울로 시집갔다 오신 강진분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병영설성 막걸리는 서울식당 밥상과 어울리면, 말 그대로 딱 떨어진다. 혹시라도 강진에 가신다면, 피해가지 마시길.

반드시 전화 후 방문해야하는 집. 외경으로 맛을 판단하면 안되는 집

승발이의 맛 평가 : 풍성한 맛의 고장에서 찾은 은은하고 맑은 맛의 막걸리. 4.3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가능하다면, 병영설성 막걸리는 강진 백반과 더불어 마시기를 강추한다. 화려한 맛의 향연에 중심을 잡아주는 은은한 막걸리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가기 어렵다면 아쉬운 데로 매콤한 양념 돼지구이로. 음악은 심플하지만 섹시한 해리 벨라폰테의 ‘Malaika’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