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의 좋은 맛, 안산 성해주
나는 안산에 산다. 수도권이지만 서울에서는 멀고, 수도권이어서 지방은 아니다. 그래서 안산을 생각할 때 늘 '변두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어떤 지역의 가장자리가 되는 곳, 변두리. 서울 변두리도 아닌 수도권 변두리인 안산에서 난 22년째 살고 있다. 생각해보니 내 삶의 절반 가까이를 살고 있는 안산의 막걸리를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었다. 22년 동안. 그리고 이 녀석을 만났다. 안산 성해주. 나름 세련된 디자인의 막걸리다. 병을 따니 좋은 산미를 품은 향이 올라온다. 누룩향도 함께. 기대감을 살며시 높여주는 향기다.
성해주 쌀 생막걸리
알코올 : 6%
재료명 : 정제수, 경기 햅쌀(쌀 100% 국내산), 누룩, 효모, 정제효소, 쌀국, 조제종국, 아스파탐, 아세셀팜칼륨
첫 잔
괜찮다. 산미가 앞서고 단맛은 절제되어 있다. 단맛이 적어 맛이 꽉 차지 않고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마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맑은 맛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세련된 맛은 아니지만, 변두리의 정감이 느껴진다. 나에게는. 탄산도 과하지 않고 적당하다. 산미와 탄산이 주도를 하고 괜찮은 누룩향이 있다. 그리고 달지가 않다. 입 안에서 맑은 맛이 돌며 산미와 누룩향이 조화를 부린다. 내가 사는 안산에 이런 술이 있었다.
둘째 잔
안주와 함께하니 맑은 청량감이 더 좋아진다. 산미도 아주 강하지 않기에 안주를 한 입하니 스윽하고 사라진다. 쌀의 단맛이 너무 절제되어 있어 얼핏 단선적인 맛이기도 하다. 입안에서 다양한 풍미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술의 기준으로만 보면 좋은 맛이다. 과한 달달함에 모든 술맛을 지워버리는 막걸리에 비교하면 매우 좋은 막걸리다. 이 정도의 맛이면 전국구 장수 막걸리보다 낫고, 지평 막걸리보다 좋다. 그렇지만 장수 막걸리보다 구하기 힘들고, 지평 막걸리보다 마시기 어렵다. 안산의 막걸리를 안산에서 보기 힘든 탓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 정인 축산이라는 작은 정육점이 있다. 세 보이지만 친절한 아저씨와 똑 부러지고 밝은 성격의 부인이 함께하는 정육점이다. 작지만 이 정육점의 고기는 질이 좋았다. 나에게 보섭살이라는 가성비 좋은 소의 부위를 알려준 곳도 정인 축산 주인아저씨였다. 돼지 전지살도 질이 좋으면 삼겹살보다 맛있다는 것을 알려준 곳도 이곳이었다. 늘 믿음직한 고기에 미소와 친절을 더해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불이 꺼져있다. 문이 닫혔다.
셋째 잔
탄산이 느껴진다. 제법 간질간질하니 목젖을 스친다. 탄산이 약한 녀석이 아니었다. 셋째 잔에 오니 술맛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진다. 대신 청량감 있는 목 넘김이 좋다. 목 넘김만으로 보면 사이다보다 탄산수의 풍미에 가깝다. 개운하고 맑게 마실 수 있는 녀석. 하지만 안주와 합을 맞출 때 느껴지는 허전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단맛을 제어하고 남은 여백을 채워주는 감칠맛이 조금 부족한 탓이다.
동네의 조그만 정육점인 정인축산도 변두리 식문화의 여백을 채워주던, 감칠맛 좋은 집이었다. 다양한 부위의 질 좋은 고기를 찾기 힘들었던 동네였다. 육회를 사다가 집에서 먹기 시작했던 것도 정인축산의 개업과 함께였다. 삼겹살의 두께도 다양하게 조절해 주어, 기름 맛이 아닌 씹는 맛으로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조그만 정육점과 함께 였다. 양념육도 정성스럽게 조미하여 팔던 인심 좋았던 부부의 가게. 그 집에서 이런저런 고기 이야기를 들으며 포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제법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건너편에 들어선 대형 식자재 할인마트와 함께 사라졌다. 규모의 경제로 가득 채운 대형 할인마트. 대기업 마트도 쩔쩔맬 정도의 지역 유통 노하우와 가격 경쟁력으로 포장한 식자재 할인 마트. 모든 많이, 싸게 주는 효율의 만찬 앞에 조그마한 정육점은 문을 닫았다.
넷째 잔
성해주 쌀 생막걸리는 꾸밈이 없다. 혹은 꾸미려 했지만 여기까지여서 좋은 맛이다. 산미와 함께 약하게 단맛이 혀 위를 스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탄산이 적어지니 단맛이 그 모습을 자그맣게 드러낸다. 기다리니 첫 잔보다 복합적이고 깊은 맛이 나온다. 모습을 드러낸 단맛 덕분이다. 작은 한잔도 기다림에, 시간에 더 좋고, 더 깊은 맛을 선사한다. 급하면 느끼지 못할, 작지만 좋은 변화의 맛이다. 살아있는 생막걸리의 아름다운 장점이다.
술도 맛있으면 그만이고, 고기도 맛있으면 그만일 수 있다. 기계적으로 소리치며 기운차게 고기를 파는, 그것도 싸게 파는 대형 식자재 마트의 고기도 맛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퍽퍽한 변두리 라이프에서 싸고 맛있는 것 이상의 효율이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정인 축산이 그립다. 그리 싸진 않았지만, 구수한 고기 이야기를 더해 썰어주고, 부부의 넉넉한 미소로 포장해주던 자그마한 정육점. 식자재 마트보다 일 이천 원 비싸도, 내가 대접받고 존중받는 생각이 들게 해 준 정육점. 질이 좋은 고기가 있어, 변두리에서도 충만한 식문화를 즐길 수 있게 해 줬던 정육점. 싸고 푸짐한 효율 앞에 문을 닫았다.
다섯째 잔
목 넘김에 전해지는 산미와 쌉싸래한 맛이 여전하다. 단맛이 점점 강해지지만 은은한 정도다. 앞으로는 꾸준히 성해주를 마실 생각이다. 안산에도, 변두리에도 멋진 막걸리가 있다. 내가 사는 곳의 막걸리다. 자주 마시련다.
승발이의 맛 평가 : 내 주변에서 찾은 멋진 막걸리. 산미가 중심을 잡은 흔치 않은 술맛이 좋다. 4.5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술맛이 순하다. 간이 센 음식보다 담백한 음식과의 합이 좋다. 샤브샤브한 고기와 마시면 아주 좋다. 샤부샤부용 고기는 보섭살을 강추한다. 정인축산 아저씨에게 배운 아주 좋은 소고기 부위다. 기름기가 적고 육향과 육질이 좋은 부위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My Home Town'을 곁들여 보자. 천천히. 취해 보자.